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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카드뉴스] 3.1 만세운동의 숨은 주역, 1탄 박인호 선생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 받아

일야간에 멸하고서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의 원수까지 갚아 독립달성 하겠습니다.”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담긴 이 어록은

춘암 박인호 선생의 것입니다.  





춘암 박인호는 1855년 충남 덕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고

15세에 의서를 공부하며 의사의 꿈을 꾸었는데요.

하지만 부패한 과거제도 안에서

그의 꿈은 펴보지도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소작농 출신인 그는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말에 이끌려 1883년 동학에 입교합니다.

동학을 믿으면 차별 없이 존중 받는 세상이 열릴 것이라 믿었기 때문인데요.

이후 농민군을 이끄는 등 동학농민운동에 앞장섰던 박인호!

그는 천도교 4세 대도주(大道主)에 임명될 정도로

천도교 교단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린 알린 3.1 운동!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벌어지기 전

천도교, 불교, 기독교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

붙잡혀 옥고를 겪게 되기도 했는데요.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독립선언서를 널리 퍼트려야 했지만일본의 감시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박인호선생은 전국의 천도교 교구에 등사인쇄기를 배치해  

독립선언서와 격고문 제작에 나서는 등 

독립선언서 배포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천도교 대교당 건축 및 기도 등의 명목으로

성금을 거두어 3.1운동 거사 자금으로 후원합니다.

천도교 교인들을 지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입니다.





일제 패망을 재촉하고 조선의 독립을 기원하는

'멸왜기도' 하도록 교단 전체에 선전한 박인호.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그는 결국,

3.1운동을 후원하고 조선 독립신문 발간에 참여한 혐의로

1919년 3월 10일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됩니다. 





하지만 2년여 간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그는 여전히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와 북경에 세워진

천도교 전교실을 통해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교인들이 신간회에서 활동하도록 용기를 북돋우는 

천도교를 통한 독립운동 지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수 있도록 도운 선생은

끝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40년 4월, 84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서거하였는데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독립을 위해 애썼던

춘암 박인호 선생의 업적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