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더불어 민주화의 바람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들어낸 양대 기둥이었다.

오랜 군사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자 했던 국민들의 염원은 대한민국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확립시켰다.

또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민 사회가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5월, 제 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장기 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여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3선에도 성공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현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종신 집권을 도모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체제를 제창합니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말살되고, 헌정 질서는 파괴되었습니다.

 

 

                                                                                                                ▶3선 개헌안 공화당 단독 변칙 처리 「동아일보」 호외

                                                                                                                                              25.5x39.3cm

                                                                                                                                                1969년

 유신체체 반대 운동은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이 납치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건 후, 본격화되었습니다. 1973년 가을, 학생들의 반 유신 시위가 일어났고, 야당 인사, 지식인과 종교인들도 개헌 서명 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의 언론 자유 운동, 야당의 투쟁 등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목소리가 드높아졌습니다. 이렇게 반발 움직임이 커지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선포해 유신 반대 및 헌법 개정 운동을 금지하고 탄압했습니다.

 

경기침체와 더불어 미국과의 외교 마찰로 박정희 정부가 흔들리던 1970년대 말, 김영상 후보가 야당 총재로 선출(1979.5)되었습니다. 김영삼 후보는 박정희 정부에 강경히 맞서며 민주화를 요구했고, 정부는 눈엣가시였던 김영삼 후보를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했습니다. 민심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여 부산, 마산, 창원에서 학생들과 일반 시민이 함께 독재타도와 유신 철폐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일명 부마민주화 운동)를 벌였습니다. 이후 시국 대처 방안을 둘러썬 권력 내부의 갈등 속에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 시해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붕괴했습니다.












                           



「씨올의 소리」 ㅣ15x20.5cm ㅣ1979년                              '부산에 비상 계엄 선포' 신문 기사 ㅣ40x24.5cm ㅣ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1979년 11월에

     발행된 월간 평론 교양 잡지.'절대 권력의 말로'를

     특집으로 싣고 해외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함석헌이 창간한 이 잡지는 정부를 비판하는 논조로

     당국과 많은 대립을 겪었다.  

 

 

최고 권력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를 맡게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지만,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동 운동이 활성화 되고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거리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해산과 전국 대학 휴교령을 내리고,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을 체포하기에 이릅니다.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는 계엄 해제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을 신군부가 자신의 집권을 시무력으로 짓밟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6.25전쟁 이후 최대의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경찰관의 일지  l  13x19.5cmㅣ 1980년 5월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근무한 경찰관의 일지.

시위의 진행 양상과 경찰의 대응, 사용 물품, 부상자, 계엄군의 개입 등을

요일별, 시간별로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제 5공화국 전두환 정부의 철권통치에도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는 계속 일어났습니다. 특히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고, 6월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뇌사한 사건이 터지자,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 했고 마침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오랜 민주화 장정은 승리의 미침표를 찍었습니다.




1987년 6월 26일 6월 항쟁 당시 부산시내의 대로에서 한 청년이 웃통을 벗어젖힌 채

    경찰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사진이 벽면에 그려져 있고, 당시 시민들과 학생이 외친

    '호헌 철폐'의 빛이 바닥에 비치는 상설전시실3. 모습

 

 

이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확대되기 시작한 시민 사회 공간은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의 확장이라는 사회 변화와 맞물리면서 한국 사회를 매우 역동적으로 변모시켰습니다. 사회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영역은 정치적으로 활성화 되고, 조직화 되었으며, 시민적 권리도 지속 확장되었죠~

 

한국의 시민 운동계도 자발적인 시민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비정부기구(NGO) 운동이 활성화 된 것은 1980년대 말~1990년대의 큰 성과입니다. 이러한 시민 사회의 요구 확대는 정치적으로 민주화의 진전과 제도 정착에 영향을 주었고, 경제적으로는 불평등한 부의 해소와 경제정의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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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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