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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통일을 향한 발걸음 1부 [정치, 사회편]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후에 남한과 북한은 적대 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국제적으로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누어져 서로를 불신하던 냉전 체제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빙기를 맞았는데요. 이런 국제 관계의 변화 속에서 남한과 북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969년 통일부 설치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남북 관계 개선과 통일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별로 어떤 지속적인 노력을 펼쳤는지 살펴보며 통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74 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

 

통일을 위한 노력 중 북한과 어떤 대화와 협상을 진행했는지, 굵직한 남북 정책을 중심으로 알아보겠습니다. 남북이 서로 대화를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입니다. 남측에서 북한에 파견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나 통일의 기본 원칙을 합의하고 오죠. 이것이 197274일에 발표한 ‘7·4 남북 공동 성명입니다. 통일의 3대 원칙, 혹시 기억나시나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입니다. 


▲  7.4 남북 공동성명(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록, 통일부 소장)

 

전두환 대통령도 바통을 이어받아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1982년에 발표했습니다. 또 남북정상회담을 처음 북한에 공식 제의했는데, 북한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북한, 적에서 통일을 위한 동반자로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

<198877일에 한 7.7선언문중 일부>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는 북한을 대결의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식의 변화로 남북한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에 관한 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등이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91년에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 하였습니다김영삼 대통령은 당선이 되자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는데요, 아쉽게도 199478일에 김일성 주석이 사망함으로 일정이 무기한 연기되었죠.

 

아픔의 노란선! 군사분계선을 넘다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 처음 제의한 남북정상회담이 김대중 대통령 때(2000) 드디어 열렸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 평양의 땅을 밟고 북한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던 그 모습 기억나시나요? 그때 느꼈던 감동은 남한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모두 똑같았겠죠. 이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했던 햇볕 정책이 이솝 우화에서 비롯된 말인 것을 아시나요? 바람과 태양의 내기에서 사람의 외투를 벗긴 것은 따스한 태양이었죠. 그처럼 남북의 교류를 기반으로 한 화해, 협력 등을 강조한 포용정책이었습니다.

 

 

▲ 김대중대통령 평양방문 기념 북한 우표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록)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 때도 있었습니다. 넘고 싶지만 넘을 수 없는 아픔의 노란선! 그 군사분계선(38)2007102일 대통령이 당당히 밟고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하고 돌아왔지요.

 

대통령이 노란 군사분계선을 넘을 때 우리에겐 세계로 뻗어나갈 육로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으로! 평양을 넘어 중국과 러시아로! 중국과 러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하나가 된 대한민국의 힘이 끝없이 펼쳐지는 날이 오길 희망해 봅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야 한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남북이 통일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남한과 북한이 같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이기 때문이겠죠. 나의 가족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만날 수 없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정치적인 노력과 별개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에서 만난 가족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도록)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서 1985815일에 남북적십자 대표단은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같은 해 9월에 100여 명의 고향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해서 가족·친지들과 극적으로 상봉하고 재회의 감격을 나누었죠. 이것이 첫 남과 북의 이산가족 상봉이었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그 해 8·15 광복절을 맞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는데요, 815일에 1차로 1,172, 20001130일에 2차로 1,222명이 이산가족상봉을 했습니다. 이후 매해마다 2회씩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졌고 2007년까지 총 16차까지 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그리고 201421, 2차 이산가족상봉이 금강산에서 34개월 만에 다시 이뤄졌습니다.

 

간절한 바람은 기적을 일으킨다

 

이산가족 상봉 때마다 많은 눈물겨운 사연들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요, 91살의 할아버지는 북한에 두고 온 자식들을 보겠다며 이동식 침대에 수액을 매단 채 아픈 몸을 이끌고 갔다 오셨고요. 또 치매에 걸리신 할아버지가 기적처럼 이산가족 상봉 기간에 정신이 돌아오셔서 북한에 두고 온 딸을 만난 이야기도 있습니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장을 품고 가는 60대 할아버지 등 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 '잃어버린 30년' 레코드판(KBS 이산가족 찾기)

(사진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현재까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29,287, 그 중 생존자는 71,503, 사망자는 57,784명입니다. 아직 10만 이상의 사람들이 가족들을 만나지 못했고 그중 절반의 인원은 이미 세상에 없습니다. 60년 넘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도록, 남북의 경계 없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가족을 볼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