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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광복70년, 가족 내에서 70년을 되찾다> 2015년 8월 15일, 더욱 더 특별한 광복70주년!

2015 8 15, 더욱 더 특별한 광복70주년!

 

올해 8 15일 광복절은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아주 특별하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과거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일본과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역사적 비극은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또한 정신대일본군 위안부라는 단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요, ‘정신대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정신대(挺身隊)’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부대라는 뜻으로, 한국 여성들이 일본을 위해 스스로 부대를 만들어 전선으로 갔다는,1)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든 말이기 때문입니다. 1) 2015.8.13 『스포츠경향』 광복절 70주년 기획절대 써서는 안 될 일본말 찌꺼기역사왜곡편 기사 인용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외할머니의 결혼이야기인데요, 일본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하셔야 했던 이야기입니다.

할머니가 소녀였을 당시, ‘여자근로정신대령에 의해 어린 소녀들이 일본경찰 처녀회조직에 강제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전선으로 이동중인 일본군 위안부’ (출처: 국가기록원)

 

신랑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하신 외할머니

1930년대 외할머니께서 사셨던 곳은 배를 타고 들어가야하는 남해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진 곳도 일본의 조선인 여자 강제동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일본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는데요, 신랑인 외할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부모님과 어른들의 결정으로 급하게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외할머니의 학교 선생님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 경찰을 따라갈 것을 권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암울하고 공포스러웠을지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끼칩니다.

 

 

외할머니께서 사셨던 남해군 용소리 이동면

 

일본 유학 중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그리고 세 남매를 홀로 키워야 했던 외할머니

어머니가 갓난아기였을 때 일본에서 유학 중이시던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어머니는 단지 사진 속의 멋쟁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 기억하고 계실 뿐입니다.

 

 

색안경을 쓴 멋쟁이, 외할버지

 

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과 홀로 세 남매를 키우셨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일제치하의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만약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이 없었더라면, 우리 외할머니와 어머니 뿐 아니라 일본에 끌려간 여인들이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광복은 과거의 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그리고 우리 가족이 직접 겪은 것이기 때문에, 올해 제 70주년을 맞이하는 광복의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