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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조선상고사의 머리말로 언급한 말입니다. 신채호는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으로 역사에 많은 자취를 남겼던 인물로, 그의 할아버지인 신성우에게 한학에 대해 배웠으며, 할아버지의 친구 신기선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때 신채호는 많은 양의 자료들을 접하면서 개화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신채호 (출처: 국가보훈처)

 

그는 1897년 성균관에 들어가 8년 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을사조약의 체결을 이유로 관직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으로 활동하여 언론인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성신문이 190511월에 무기정간된 후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에 참가하게 되었는데요, 여러 사론을 써 민중을 계몽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는 등 항일언론운동을 벌였습니다. 1907년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와 관련해 다수의 글을 발표하여 그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이듬해 순 한글의 여성잡지인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했으며, 또한 《대한협회보》, 《기호흥학회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며 1909년 친일조직인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습니다.

 

1910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평안북도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 청도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인 권업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인《권업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하였고, 1915년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고, 조소앙 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썼습니다. 이듬해 그는 윤세용 형제의 초청으로 동창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켰는데, 이 시기 동안 만주에서 생활하면서 백두산과 만주 등 부여, 고구려, 발해 유적을 답사하면서 고대사를 체계화하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그 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되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국채보상운동관련(출처: 공공누리)

 

1919년 상하이에서 거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으나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주간지《신대한》을 창간했습니다. 그는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을 이루어야 하며, 현재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되어 그는 10년형을 선고 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습니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그는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또한,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재 신채호는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