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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독립운동의 막후 연출자, 몽양 여운형선생

독립운동의 막후 연출자, 몽양 여운형선생

 

 

몽양 여운형 생가·기념관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에는 몽양 여운형 생가와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 곳은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민족의 큰 스승, 몽양 여운형 선생의 유품과 자료가 전시가 되어있는데요, 전시 관람을 통해 그 분의 삶과 사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그의 생가를 재정비하여 2011년에 복원하였고, 바로 그 해 11월에 기념관이 개관하였다고 합니다.

 

1886525,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골에서 출생한 여운형 선생은 그의 어머니가 치마폭에 태양을 품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 하여 몽양(夢陽)이란 아호를 얻었습니다. 1900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907년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학문과 신문물을 받아들인 후생가에 기독 사립 광동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몽양기념관

 

1900년대 초 일제는 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고자 한국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게 하였고, 일본에 진 1300만원의 빚은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해당하는 액수였습니다. 이때,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는데요, 국채보상운동의 양평 총책임자가 바로 여운형 선생이었습니다. 선생 스스로 매일 장터를 찾아 다니며 담배를 끊어 국채를 갚자는 계몽강연을 하였고, 조선의 독립 전까지는 절대 금주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몽양이 술을 마시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 제국호텔에서 독립 연설을 하는민족의 웅변가 여운형

 

191811, 몽양은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습니다. 외교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힘썼던 몽양은 19191월 신한청년당 대표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그곳에서 가서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만주, 연해주에 있던 교포들과 유학생들, 그리고 국내 지도층에 알려지면서 거족적인 3.1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3.1운동의 막후 지도자는 몽양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 부분은 일본 정부가 그를 동경으로 초대한 것에서 간접 증명이 됩니다. 당시 조선에 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가 당년 34세의 젊은 몽양을 동경에 불러들인 까닭은 3.1 운동의 막후 연출자인 몽양을 회유하여 독립운동보다는 자치운동을 권유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열도의 간담을 서늘케 한 그의 사자후는 그를 초청한 하라 내각의 사퇴를 불러올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 때가 되어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따라 우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운동 또한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결코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에 도취되어 일어난 게 아니올시다. 이제 조선민족은 열화 같은 애국심이 폭발했습니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써 조국 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을 과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2008년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에 서훈된 몽양의 훈장

 

1945'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를 묻는 해방 후 첫 여론조사에서 몽양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는데, 당시 남북한 지도자 가운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가장 애를 썼고 더불어 가장 존경 받고 인기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모든 독립운동이 멸절된 삼엄한 감시 속에 국내에서 조직적인 실체를 유지한 유일무이의 독립운동 단체 조선건국동맹의 리더로서, 해방된 당일, 엔도오 정무총감을 만나 그 자리에서 조선치안권을 이양 받은 몽양은 그 날 저녁 안재홍과 함께 계동 입구의 임용상 집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1946년에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여, 5차례의 38선 이북 방문 등의 활동을 하며,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좌우합작·남북연합 운동에 전력을 쏟던 여운형 선생은 1947719, 해방 후 12번째 테러인 권총 피격으로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피격 당시 입으셨던 몽양의 유품

 

좌우연합과 통일을 위해 해방 이후 2년간 줄기차게 노력하는 과정에서 몽양 선생은 좌우 극단적인 정치세력으로부터 12차례의 테러를 당했고, 결국 피격으로 서거하게 되었습니다. 좌우정치세력의 팽팽한 기싸움으로 인해 아직까지 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뒤늦게나마 대한민국장으로 서훈되었습니다.

남북한이 하나되는 날, 몽양 여운형 선생의 공로는 재조명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