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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나운규 <아리랑>

나운규 <아리랑>

 

<아리랑>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많은 인기를 누리며 상영되었던 우리나라 초기 영화입니다. 1938년까지 서울에서만 18차례 재상영 되었고, 지방에서는 1950년대 초까지도 많은 인기를 누리며 상영되었습니다. 영화 <아리랑>은 현재 영화관에서는 볼 수 없지만 우리나라 영화사에 있어서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를 담은 무성영화의 시작을 알린 중요한 작품입니다.

 

 

상암 DMC ‘한국영화박물관

 

영화 <아리랑>에 관련된 자료는 서울 상암동 DMC에 있는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감독이자 배우였던 나운규의 <아리랑>은 민족 영화의 기원이자 우리나라 영화의 시작을 확립한 작품입니다. 아리랑과 관련된 영화제작 사진첩과 그 당시 사용했던 소품 등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듯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되어 있는 영화 <아리랑>의 소품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를 울렸던 나운규의 <아리랑>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 날이 아직 많이 남은 청년 영진(永鎭)은 불우한 현실 속에서 그만 정신이상자가 됩니다. 그는 악질 지주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 동네 사람들은 물론 사랑하는 연인마저 유린하는 오가(吳哥)에게 이성을 잃고 낫을 휘두르게 됩니다. 상대의 피를 보고서야 문득 정신이 돌아온 영진은 일본인 순경에게 붙잡혀 수갑을 찬 채 아리랑 고개를 넘어갑니다. 그 장면이 마지막 장면으로 그 순간 흘러나오던 주제가인 「신아리랑」을 들으며 많은 관객들은 공감의 눈물과 함께 소리 죽여 합창했습니다. 일제의 검열을 피해 나운규가 몇 겹으로 걸쳐 놓은 영화 속 우의법(寓意法)은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을 더욱 절묘하게 파고들었고, 응축된 감정은 마침내 주제가를 통해 분출되었습니다

 

2015년 단성사의 모습

 

영화가 완성되자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은 지금의 종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영화 <아리랑>은 전국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 영화의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제작이 활발하여지는 한편, 당시의 조선영화계가 번안모방물이나 개화기신파물 제작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민족영화 제작으로 영화의 전통을 쌓게 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