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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역사의 아픔을 노래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여러분은 매년 5월만 되면 뉴스에 적지 않게 등장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노래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을 담고 있는 노래입니다.




대형 버스를 앞세우고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광주 금남로를 가득 메운 시민과 학생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80 5 18일은 광주항쟁이 시작된 날입니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의 바람이 신군부의 잔인한 총칼에 짓밟힌 비극의 시작이지요. 광주시민들은 자유로운 나라에서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싸워야만 했습니다. 마지막 싸움이 끝난 5 27일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10일의 시간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웠던 많은 광주의 시민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출처 : 5·18기념재단)




그로부터 1 뒤인 1981, 광주항쟁을 기억하고자 모인 15명의 사람들은 <넋풀이(빛의 결혼식)>라는 노래극을 구상했습니다. 노래극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계엄군에 의해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9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래극에 사용하기 위해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미발표 장시인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하여 작사하고 김종률이 작곡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노래는 세상을 떠난 남녀가 산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격려와 희망의 노래로 합창되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이후 1982 2 20 윤상원과 박기순의 무덤이 합장된 이후 임을 위한 행진곡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 전국으로 퍼져 매년 5월이 되면 곳곳에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는 민주항쟁의 상징이 되어 민주화운동이 열리는 곳이면 항상 민주항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묵념과 함께 불리곤 했습니다. 1987 박종철고문치사사건때에는 희생된 박종철군의 아버지인 박기정씨가 아들의 재를 뿌리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출처 : 5·18기념재단)




이렇게 수많은 희생위에서 마침내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자유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그들의 희생이 국가적으로 인정받게 되어 5·18민주화운동이 정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2008년까지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공식적으로 제창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2009년부터 노래를 부르는 방식이나 순서, 그리고 노래의 의미에 대한 해석 등의 문제로 인해 많은 논란이 생겼습니다. 2013 6 국회에서 노래를 5·18광주 민주화운동의 공식 추모곡으로 지정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나 여전히 5월만 되면 임을 위한 행진곡 이에 대한 논란은 논쟁거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1980년대 어두운 시대를 살아내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민주항쟁에 뛰어들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를 향한 위로였고 격려였습니다. 물론 지금 노래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전에 임을 위한 행진곡 기리고자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외의 문제들로 인해 가려지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