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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그때의 작은 영웅들





11 3일은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입니다. 본래 학생의 이었다가 2006년부터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과거의 11 3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기념일은 어떠한 계기로 정해지게 되었을까요?

 

바로 1929 11 3 일어난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문입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 11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가장 규모로 벌어졌던 항일운동입니다. 사건은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들이 우리나라 여학생들을 희롱하는 모습을 우리나라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일본 학생들의 편만 들면서, 한국 학생들에게는 일방적인 구타를 가하였습니다. 사실이 알려지자 광주 학생들은 사람이 많이 모인 전남 누에고치 6백만 돌파 축하회가 열리던 11 3일에 광주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격렬해지자 일제는 광주시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시위에 참여한 한국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비>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신간회를 포함한 여러 사회단체들은 조사단을 파견하며 학생들의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게 됩니다. 이들은 11 11 저녁에 격문을 살포하고, 11 12일에는 광주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9개의 항목을 내세웠습니다. 이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광주 지역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인접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확산은 훗날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 발달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1930년대 초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맞서 대중운동을 활발히 벌이는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또한, 사실 19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요구는 교육환경 개선이나 일본 교사 배척 학내 문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는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이라는 문제를 직접 제기하였다는 데에도 의의를 가진다고 있습니다.

 

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은 당시 항일 운동에 크게 기여했던 학생들의 용기와 노력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공휴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지 말고, 이번에는 잠깐이라도 그때 나라를 사랑했던 학생들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는 어떨까요?

 

 

* 사진, 정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광주학생항일운동 [光州學生抗日運動]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