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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잊혀가는 역사의 흉터 2 – 덕수궁 중명전


이날, 놓아 통곡하노라(是日也放聲大哭)

 

1905 11 20 장자연이라는 사람이 황성신문 사설의 제목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장자연은 놓아 통곡하였을까요? 당대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난 해인 1905(을사년) 빗대어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을사늑약(혹은 을사조약)입니다.


지난 10, 저는 잊혀가는 우리 역사 속의 흉터인 경술국치의 현장, 남산 통감관저에 관한 소개를 해드렸는데요. 기사에 이어, 이번 기사에서는 11월의 사건인 을사늑약이 일어난 장소인 '덕수궁 중명전' 관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중명전 전경 / 출처: 두산백과

 


1897 대한제국 선포 이후 경복궁에 이어 대한제국의 황궁이 경운궁(덕수궁의 본래 이름) 황실 도서관으로, 1901 중명전이 탄생합니다. 중명전은 1904 경운궁에 대화재가 일어나자 고종의 집무실로도 사용되었던 중요한 건물이었습니다.

 

이렇게 경운궁(덕수궁) 중요 건물로 활용되던 중명전에서는 1905 11 17일에도 여느 때와 달리 대한제국의 내각회의가 열리고 있었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자리에는 일왕의 특사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04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 의정서와 1 · 협약을 체결한 일제는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왔습니다. 7월에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으로부터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동의를 구했고, 8월에는 2 · 동맹으로 영국의 동의를, 9월에는 포츠머스 조약으로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러시아를 쫓아냈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 일제는 마침내 이토를 전권대사로 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대한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양국이 대등하고 평화롭게 회의해야 조약 체결의 공간이었던 중명전에는 일제의 병력이 배치되어 각료를 압박하였고, 이토와 주한일본 군사령관은 고종황제에게 직접 찾아가 파렴치하게도 협박을 하였습니다.



을사늑약 풍자도 / 출처: 미디어경제

 


외교권을 넘겨주는 말도 되지 않는 조약이니만큼, 각료들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부대신 권중현 5명은 한규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도 되는 조약에 도장을 찍습니다. 중명전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인하여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되고, 5 뒤에는 아예 일제에 나라를 병탄 당하는 단군 이래 최고의 수모를 겪게 됩니다.


1905 외교권이 박탈당한지 어느덧 111년이 흘렀고, 지난번 취재한 남산 통감관저에서의 경술국치를 겪은 106년이 되었습니다. 1세기가 지나며 이제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속에서 잊혀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친일파 청산 실패와 독립유공자에 대한 홀대 우리의 아픔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경술국치와 을사늑약이라는 역사 상처는 쉽게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면교사로 삼으며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반복되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계기로 삼으면 한국의 미래가 밝아질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