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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조선민족청년단과 철기 이범석



김좌진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범석 장군. 그의 삶과 조선민족청년단이 어떤 곳인지 수원박물관의 특별전시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지요.



 

<철기 이범석>

 


1913 이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경기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범석은 1915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원난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자, 구대장 서가기가 자기의 () () 덧붙여 철기라는 호를 지어주었습니다. 여러 곳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1920 10 청산리대첩에서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2 제대 지휘관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1923 고려혁명군기병대장이 되었습니다.

 

1946 10월에는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비정치·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민족지상의 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집권자로부터의 억제와 국수주의적 극우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조선민족청년단>



1946 10 9일에 설립된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100 명이 넘는 청년들이 소속되어 있던 대표적인 청년단체 하나입니다. 족청은 비정치·비군사·비종파를 내세우며 청년 훈련에 주력하였으며, 단장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던 이범석이 맡았습니다. 족청은 군정으로부터 정기적인 예산을 받는 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민족지상-국가지상 기본 이념으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좌익 출신 인사들을 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족청 중앙훈련소가 설치된 곳은 현재 보훈원이 있는 수원시 장안구 광교산로 인근에 해당되는데, 해방 직후 군정이 기존 일본군의 육군병원 부지였던 장소를 족청에게 제공하여 중앙훈련소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중앙훈련소 임원으로는

 

: 이범석

부소장 : 송면수, 이준식, 안춘생

훈련대장: 김근찬, 훈련과장: 최주종, 교무과장: 유해준, 학생과장: 장준하, 서무과장: 이유종

 

이와 같이 광복군 2 지대 출신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946 11월에는 수원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1개월 과정인 청년 간부훈련에 착수하였는데, 당시 훈련 지원자 수는 2만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들 중에서 200명을 선발하여 1946 12 1 훈련생의 입소식을 가졌으며, 7기생부터는 여성간부훈련생도 입소시켰습니다.

 

훈련은 정신훈련, 지능훈련, 체력훈련, 생활훈련, 실천훈련으로 나누었습니다.

전체 훈련시간이 304시간이 되므로 4주로 나누면 1주일당 76시간에 해당됩니다. 이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수련생들은 이범석의 지휘하에서 뭉쳐, 각기 사는 고장과 소속되었던 단체에 돌아가 족청의 하부조직을 결성하여 강화해 나감으로써 전국적인 막강한 조직을 형성하였습니다. 이처럼 조직이 확장됨에 따라 정계와 사회의 일부에서는 광복군 활동의 연장, 독재운동단체, 심지어 용공 단체라는 비판의 소리가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1952 5월의 정부통령선거에 즈음하여 원내 자유당의 기선을 제압하여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으나 이범석은 낙선하였습니다. 족청계는 선거에 비협조적이던 인사들을 규탄하는 한편, 외로도 공세를 펼치며 1953 5월에 대전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실력행사를 통해 당권을 거머쥐었는데요. 하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9월에 이승만은 족청파 제거를 단행하여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의의


해방 청년단체는 주로 정치조직의 산하기관으로 결성되어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또한, 해방 직후 청년운동은 치안유지·일제 잔재청산 목표로 전개되었으나, 정치단체의 이념 갈등이 청년단체로 이어짐으로써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좌익 청년단체는 주로 파업, 시위, 삐라 살포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우익 청년단체는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전위대가 되어 폭력적인 테러를 일삼았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청년들을 훈련시켜 신국가 건설을 위한 향후 지도세력 양성을 위한 청년 훈련의 필요성 대두되었습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조선민족청년단은 비정치·비군사·비종파를 가치로 하여 민족지상-국가지상 이념으로 통일 한국을 이끌 청년을 훈련시켰는데요. 하지만 이범석이라는 개인에 좌우되며 결국은 정치적인 단체로 전락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