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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창경궁의 벚꽃 흩날리는 봄도 일제의 흔적이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가족 여러분, 벌써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이 왔네요~ 저는 가끔 눈이 다음 아침 일찍 고궁을 찾는데요. 겨울이지만, 푸근하고 고즈넉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지요. 내린 고궁의 아침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때로는 아픈 이야기를 품은 채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서울에 자리 잡은 조선의 4 , 중에서도 오늘은 창경궁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창경궁 전경 문화재청>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 창경궁

창경궁은 조선 성종 , 왕실의 웃어른인 분의 대비가 편안히 지낼 있도록 창덕궁 근처에 마련한 궁궐입니다. 조선으로서는 번째 궁궐이죠. 경복궁이나 창덕궁은 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지어진 궁궐인데, 그에 반해 창경궁은 처음부터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궐이었기 때문에 앞의 궁궐과는 차이점이 많았습니다. 전각의 수가 적고 아담하며, 지세에 따라 언덕과 평지를 따라가며 터를 잡고 필요한 전각을 지었지요. 왕실 가족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던 창경궁에는 왕들의 지극한 효심이나 왕비와 후궁 간의 갈등, 왕과 세자의 애증 많은 왕실의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이왕가박물관 네이버>

 


유원지로 전락해버린 고궁

 창경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도성안의 궁궐이 모두 불타면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었으나, 이후 다시 소실되고 맙니다. 창경궁은 소실과 복원을 반복하면서도 자리를 어렵게 지켜왔었는데요,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변화를 맞이합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즉위하면서부터인데요. 1907 순종의 즉위 , 일제는 아버지를 잃은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 1911년에는 궁궐의 이름 역시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창경궁은 이제 대한제국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이 아닌유원지라는 되어버린 것이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었던 자경전 터에는 일본풍의 박물관인 창덕궁박물관(이후 이왕가박물관) 세웠습니다. 뒤이어 1912년에는 하나로 연결되었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율곡로를 개설하여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창경원 벚꽃 풍경 국립고궁박물관>

 


벚꽃 흩날리는 봄도 일제의 잔재였다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창경원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였습니다. 대표적인 소풍과 꽃놀이 장소로 6~70년대의 창경궁은 국민적인 명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창경원 벚꽃 터널 걷는 것은 당시 신세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데이트 코스였죠. 그래서 창경원에서의 예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즐겁게 찾았던 창경궁의 벚꽃들 역시, 일본이 심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일제는 1922 창경궁 안에 우리나라 수종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2 뒤에는 벚꽃놀이를 시작했죠. 창경궁 벚꽃놀이는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도 많은 인기를 누리며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궁궐을 되찾다

창경원이 우리의 궁궐로 다시 회복된 것은 1980년대입니다. 1983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은 창경궁의 복원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해부터 창경궁에 있던 동물들은 차례차례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문화재관리국은 창경원 아니라, 창경궁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하려고 복원을 시작했습니다. 과정에서 서로 창경궁의 벚나무를 어떻게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회적 논의가 있었지요. 일제의 잔재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많은 추억이 담긴 나무들이기 때문이었죠. 결국, 창경궁의 벚나무는 전국의 학교나 공원으로 옮겨 심어지고, 지금의 창경궁에는 느티나무나 참나무와 같이 한국 고유의 수종으로 채워졌습니다.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문화재도 변화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우리의 궁궐에 본래의 모습과 이름을 되찾아 주는 것도 우리의 일이 아닐까요? 일제의 흔적에서 되살린 우리의 문화재, 창경궁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