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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목면의 아버지, 문익점의 의복 이야기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다고 알려진 문익점.

 

하지만 실제로 목화씨는 중국의 반입 금지품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후대에 문익점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문익점이 면직물 생산과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사실은 변함없을 것입니다.



<문익점 / 출처 : 나무위키>

 


고려 공민왕 문과에 급제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 그는 목화씨를 가져오는데 그치지 않고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 면직물을 짜는 것에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양반들은 비단으로 옷을 입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겨울에도 모시, 삼베 등의 거친 옷감으로 옷을 입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런 시대에 등장한 면은 시대를 뒤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죠.

 

면은 화폐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국가 경제의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중 면포는 국제경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일본에 수출해 은을 수입하고 다시 중국에 되팔아 비단과 도자기 등을 수입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목화 재배가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작물이니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막막했던 것입니다. 문익점은 자신이 가지고 목화 씨앗 10 5개를 장인이었던 정천익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각자 목화 재배에 도전했습니다. 결과는 1개의 씨앗만이 싹을 틔웠는데요. 여기서 얻은 목화씨로 도전에 도전을 거듭해 결국 목화 재배에 성공하게 됩니다



<목면 시배 유지 / 출처 : 한국관광공사>

 


문익점이 처음 목화씨를 심었던 시배 유지는 사적 108호로 지정돼 지금도 보호되고 있는데요. 만일 문익점이 목면재배를 도중에 포기했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아마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문익점을 추모하기위한 도천서원 / 출처 : 경남도민일보>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드는 베와 비교하면 품질은 물론, 생산성도 높아 노동력도 아낄 있었던 목면. 또한, 보온 효과까지 뛰어나 민생의 삶의 질이 크게 나아졌습니다. 이런 공로로 그가 죽고 태조는 직위를 내리며 그의 혼을 기렸을 아니라, 태종은 그의 아들 문중용에게도 벼슬을 내리기도 하였는데요. 또한, 세조 때에는 사당을 세워 차례씩 제사를 지냈죠. 지금 경남 산청에 가면 목화 시배유지와 함께 문익점의 묘소, 그의 공적을 기리는 신도비 등을 확인할 있습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손수 농사짓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관리 문익점. 비록 목화씨를 들여온 과정이 알려진 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마음만큼은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