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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당에 자리잡은 남연군묘의 수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8. 19. 15:17

명당에 자리잡은 남연군묘의 수난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었으나, 정조의 넷째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습니다. "남연군"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입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의 주인공이죠. 남연군은 사실 생전에 그렇게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 그는 근대사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들의 중요한 인물로 매우 독특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연군 묘 앞에 있는 가야사 터

 

19세기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강화에서 나무꾼이었던 "강화도령" 철종을 왕으로 세워 꼭두각시로 이용할 정도였습니다.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파락호인 척하며 전국 각지를 10년이나 떠돌아다녔지요. 그는 풍수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만인이라는 지사(地師)에게 덕산 가야사 자리가 명당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2대의 천자가 나오는 땅이라는 것이었지요. 흥선군은 가야사에 몰래 불을 질러 없앤 후, 1846 경기도 연천에 있던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합니다. 이곳이 정말 명당이었던 것인지, 이장한 지 17년 후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즉위하여 고종이 되었습니다.

 

 

()높은 언덕에 자리한 남연군 묘 / () 남연군 묘의 모습

 

그런데 1868, 남연군묘가 파헤쳐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입니다. 흔히 오페르트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사건은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프랑스 천주교 신부 페롱, 미국 상인 젠킨스 등 세 명이 공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통상수교 우선권 획득, 병인박해에 대한 복수, 일확천금에 대한 꿈 등 저마다 다른 이유로 일을 계획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천주교신자 2명과 유럽인, 필리핀인, 중국인 등 130명을 싣고 중국 상해에서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10시경 구만포에 상륙한 후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칭하며 덕산군청을 습격해 무기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는 남연군묘로가 도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남연군묘가 석회로 두텁게 쌓여 도굴이 쉽지 않아, 그들은 결국 도굴을 포기하고 구만포로 철수하게 됩니다.

 

대흥 읍성에 있는 척화비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그들이 철수하여 정착한 영종도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전한 서신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예정 계획을 버리게 되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결코 그 수단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다. 각하는 이제 국내에 무한한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할 것이나 우리 외국인은 쉽사리 가야동 깊은 곳까지 방해를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나는 각하를 위하여 권고한다. 현재 주위에 있는 간신을 물리치고 전에 귀 정부에 제시한 조약초안을 검토한 후 조속히 회답해줄 것을 요청한다."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사과가 아닌 일방적인 통상 요구에 흥선대원군은 "나를 해치려는 목적으로 이 나라에 침입을 기도한 것은 실로 언어도단이다. 결코 화호를 요구하는 도리에 적합하지 않은 일이다. 생각건대 이는 한국으로부터 도망한 사당들(천주교도들)의 감언에 유인된 듯하다. 한국은 외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아니한다. 만약 나라의 금지사항을 범한 자가 있으면 체포, 처벌한다."

라고 답서를 보내지요. 이 사건이 있은 후 흥선대원군은 남연군묘를 안내했던 천주교도들에 대해 더욱 탄압을 가했으며, 통상 수교 정책을 강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통상수교거부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3년 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웁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합니다. 이는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하나의 줄기로 이어져 있습니다. 남연군묘의 이장이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 오페르트의 도굴사건, 척화비의 건립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인식하면 활자로 죽어있던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언제나 이에 대해 잊지 않고 역사를 바라봤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