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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물건 이야기

국토를 종단하는 대동맥 길 ‘경부고속도로’ 역사





196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산업 구조가 급속도로 고도화되면서 농업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자, 조선, 자동차, 철강 등 제조 부분 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배경에는 바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있었습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린 경부고속도로 구상 스케치 / 출처 : 국가기록원 >



47년 전이었던 오늘, 1970년 7월 7일. 국내 두 번째인 고속도로인 경부고속도로가 국내 첫 개통을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시간을 약 15시간에서 5시간으로 단축하는 놀라운 업적을 달성했는데요. 사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초기에는 부정적인 여론이 꽤 팽배했었다고 합니다.  



< 경부고속도로 공사 구간 / 출처 : 국가기록원 >



당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던 것은 바로 재원 조달 방안이었는데요. 이에 정부는 각 주요 기관들에게 예산안 제출을 지시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비가 모이고 착공을 시작하려 했지만, 당시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비를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들을 위해 우선으로 쏟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 청자 담배 포갑지 /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우려와 비판 속에서도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해 나갔는데요. 드디어 1968년 12월 한남-수원 구간이 첫 개통 되면서 수원-오산, 오산 -천안, 천안-대전 등 차례로 개통을 이어나가다가 드디어 1970년 7월 서울에서 부산까지 완전한 개통을 이루었습니다. 정부는 2년 5개월 만에 완공된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최초의 고속도로 휴게소인 추풍령휴게소에 30.8m의 기념탑을 세우고 당시 유행하던 담배 ‘청자’의 포갑지를 만들었습니다. 포갑지 앞면 좌측 부분에는 고속도로 그림과 함께 '민족의 대동맥 통일의 길'이란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이 특징이죠?  



< 경부고속도로 비상착륙훈련 / 제공: 국가기록원 >



1970년대 후반을 넘어가면서 경부고속도로는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는데요. 철도의 운송 효율을 추월하면서 80년대 중반에는 국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고속도로가 되었습니다. 특히, 명절에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교통체증을 유발했는데요.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서울-부산 구간의 소요시간이 약 22시간에 달했다고 합니다. 개통 당시 노면 중앙 분리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구간은 유사시 군사 목적용 활주와 항공기 비상 착륙을 위해 설계된 용도였다고 하네요. 



< 경부고속도로 최대의 난공사 구간 지금의 옥천터널인 당재터널 / 출처 : 경향신문 >



그렇다면 경부고속도로의 최대 난공사 구간은 어디였을까요? 그 길은 바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히기도 했던 충북-옥천 간 구간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이 노력해도 불과 30cm밖에 뚫지 못하는 공사는 작업자들이 공사를 포기하고 달아날 만큼 힘든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 1970년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는 코로나 자동차와 할아버지 / 출처 : 경향신문 >



제2차 경제개발 5개년의 최대 과제였던 경부고속도로는 공사비 총 429억 원, 공사 기간 2년 5개월, 16개의 시공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한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공사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의 일일생활권 시대가 열리고 약 2,704억 원의 유류비용이 절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적, 물적 자원의 지역 간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지역의 고른 발전도 가능하게 되었으니 대한민국 근대발전의 초석이 된 고마운 고속도로임이 분명하죠?    



< 77인의 위령탑 / 출처 : 주간 경향 >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금강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건설 중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77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데요. 혹시 그곳을 지나게 된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위령탑 앞에서 그들을 기리는 짧은 묵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