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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뜨거운 외침으로 남은 청년 전태일

뜨거운 외침으로 남은 청년

전태일

 

지난달아파트 경비원 열악한 근로 환경을 호소하며 분신을 기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7일에 끝내 돌아가셨지요. 44년 전에도 이와 같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근로기준법’을 고발하기 위해 청년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노동자에게 인권이 있다고?

 

1948년 대구 출생의 전태일은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서 재봉일을 도와야했습니다. 1년 후 태일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는데요, 이곳에서의 사정은 더 좋지 않았습니다.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서 하루에 14시간을 일해 받은 돈은 겨우 50원. 그 돈으로는 1백20원하는 하루 하숙비를 낼 수 없어 퇴근 후에는 구두닦이와 껌팔이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기술을 배우면 벌이가, 형편이 더 나아질 거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하나씩 현실이 되는 듯 했습니다. 평화시장에 있는 삼일사에 재봉사로 일하게 되었고, 또 몇 년이 흐른 후에는 재단기술 의류공장인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가혹한 노동 환경을 겪게 됩니다.


▲한미사 동료들과 전태일(오른쪽 끝) (출처: 전태일재단)

 

한 여공이 일을 하다 걸린 폐렴으로 해고를 당하고, 그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전태일도 해고를 당한 것이지요. 이 일로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데요, 1968년에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인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

 

이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입해서 밤새도록 공부하고 노동현장에서 근로기준법의 조항을 대며 저항을 합니다. 잘 지켜지지 않는 노동법을 근거로 시청 근로감독관실에 찾아가 근로기준법상의 감독권으로 평화시장을 감독해달라는 요청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평화 시장의 참혹한 근로 환경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전태일의 편지(출처: 전태일재단)

 

그러나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 말고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라는 뜻의 ‘바보회’를 결성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설문을 통해 현재 근로실태를 조사하는 한편, 언론사를 찾아다니며 노동자의 참상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에 평화시장의 참상이 대대적으로 보도됩니다. 이에 힘입어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노동환경 개선 요구를 하지요. 하지만 결과는 거절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탄원서도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0월 24일에 예정된 거리 시위도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 7일까지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한 노동청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요.

 

근로기준법 화형식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동료들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열고 시위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경찰에준비한 플래카드 빼앗기자,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인 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외쳤지요. 이 땅에 근로기준법이 있음을, 그것이 지켜져야 함을 끊임없이 외쳤던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끝내 불꽃이 되어 재가 되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은 이후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이어 다른 공장에서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의 ‘근로기준법 화형식’ 장면(출처: 전태일재단)

 

한때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른 빛나는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일했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어려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