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동아일보의 사설 첫 머리에 쓰인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짐작 가는 인물이 있으신가요? 아마 이 사람이 누군지는 쉽게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입니다.
저는 8월 29일 우리 주권이 일제에 병탄당한, 경술국치의 날에 이완용과 당시 통감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체결했던 남산 통감관저 터에 다녀왔습니다.
〈남산 통감관저 터와 표지석〉
남산 통감관저 터가 생소하신 분들이 굉장히 많으실 꺼라 생각되는데요. 이곳은 일제가 강제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사조약)’에 의거하여 설치된 곳입니다. 즉,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 행사하는 일본의 관리인 ‘통감’이 거주하는 관저인 것이죠.
1905년부터 이곳을 다녀간 사람은 총 2명입니다. 바로 초대 통감이자 한국 병탄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와 2대 통감이자 초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입니다.
남산 관저가 중요한 유적인 이유는 위의 이유 말고도 하나가 더 있습니다. 표지석의 설명을 자세히 보면, 이곳이 바로 한국의 주권이 박탈당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라고 적혀 있는데요. 통감이 업무를 보는 통감부가 아니라 사적으로 머무르는 관저에서 한 나라의 주권이 박탈당한 것일 까요?
그 이유는 이완용의 통감과 일본제국을 향한 충성(?)때문이었습니다. 이완용은 한시 빨리 병합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제국의 작위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일국의 최고 직인 내각총리대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업무장소도 아닌 통감의 관저에 ‘직접’ 찾아가 조약의 내용과 체결과정에 대해 논의 하고,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서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이 후일에 대한제국이 ‘원해서’ 합병했다는 말도 되지 않는 이유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1945년 해방 그리고 갑작스러운 전쟁을 겪고 난 뒤, 이 곳은 사람들에게 잊혀 갔습니다. 이 곳이 무엇이 일어난 장소인지는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만 간직 되었지요. 하지만 2010년 경술국치로부터 100년이 되던 날, 시민들에 의해 이곳에 자그마한 표지석이 세워졌고, 2016년 8월 29일에는 서울시와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일본군 위안부를 추모 하는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아픈 역사를 조명하고,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여러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역사 기억해서 무엇 하겠는가?’라는 말을 던지며 일제강점기나 민족의 수치가 담긴 유적, 기록물들을 방치하거나 아예 없애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정부 차원에서는 등록문화재 지정을 통해 유적들을 보존하고, 남산 통감관저 터와 같은 곳을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습니다. 눈을 가린다고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역사가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슴 속에 자랑스러운 8월 15일, 3월 1일이 있다면, 8월 29일과 남산 통감관저도 가슴 속에 새기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날로 기억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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