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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광무개혁

광무개혁

 

 

광무개혁이 실시된 시점인 1897년부터 1904년까지는 열강의 세력 균형기였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 내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졌으며,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력, 그리고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습니다. 1897년 고종은 경운궁(현재는 덕수궁)으로 환궁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조선의 주체적인 마지막 개혁이 시작됩니다.

 

 

아관파천의 막을 내린 고종의 환궁 행렬

 

광무개혁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그동안의 외세에 의존적이고, 외국 제도의 모방에서 비롯되었던 갑오개혁·을미개혁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광무개혁을 한 가지 키워드로 말한다면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 법을 근본으로 삼고 새로운 것을 첨가한다는 뜻으로 광무개혁은 기존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대대적인 개혁이 아닌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온건한 성향의 개혁이었습니다.

 

광무개혁의 제1요소는 황제권 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제의 통치권을 집중시키기 위해 황제가 육ž해군을 통솔하도록 하였습니다. 중앙의 군제와 전국 지방군을 개편하고 창설하였습니다.

 

 

189978, 친위대 제1중대 소속 병졸 김종환을 구류, 영창을 보냈음을 친위대 제1중대 이항노 중대장에게 보고한 내용

(출처: 공공누리)

 

1899년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가 반포되었습니다. 황제의 통치권을 강조하고, 황제가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게끔 규정했으며, 의회를 두지 않음은 물론 황제권을 제한할 수 있는 어떤 조항도 두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였습니다. ‘대한국국제’ 제1조에서 “대한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되어 온바 자주독립하는 제국이니라.”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마치 대한제국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같이 독립적 위치에 있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자 했던 고종의 꿈이 보입니다. 어쩌면 그것만이 조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당시에는 약육강식적인 세계질서가 지배하던 시기라서 강력한 황제권을 기반으로 자주독립과 강력한 군사력을 갖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사회·정치적인 개혁으로는 전등·전차·전화·전신사업을 처음으로 시작했으며, 근대적인 기술교육에도 주력하여 기예학교·의학교·상공학교·외국어학교를 비롯, 모범양잠소·공업전습소 등을 설립하여 근대적 기술을 보급하기에 힘썼습니다. 미국인 기술자를 고용, 서양기술을 이용하여 양전사업을을 실시하고, 지계제도를 채택, 토지문권을 발급했습니다. 상업진흥책으로는 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 등의 금융기관이 설립되었으며, 의료사업으로는 광제원이 설립되는 한편, 전염병 예방규칙이 반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추진되던 광무개혁도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재진출함에 따라 중단되었습니다. 애초에 러일 대립에 의한 정치적 공백기를 노렸던 개혁인 만큼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됨에 따라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에 의해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광무개혁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대립되는 세력으로 대두한 독립협회의 시정개선 건의를 제대로 수렴하지 못한 것, 재정적 뒷받침 없이 개혁을 추진한 것, 민중의 경제생활과 국가 재정을 희생시키고 부정부패를 조장시키는 가운데 왕실 재정을 개선한 것, 철도의 부설 등을 외국인에게 특허하여 그 기술과 자본에 의지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있던 대한제국 시기의 제단 (출처: 공공누리)

 

그러나 국가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한 점과 왕권의 전제화를 예외로 한다면 갑오·을미개혁을 대체로 그대로 이어 추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합니다. 따라서 1990년대부터는 대한제국을 중세 국가에서 벗어나 절대왕정을 지향한 과도기적 근대 국민국가로 보는 시각이 제기되었습니다. 물론 대한제국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력과 군사력을 제대로 갖춘 국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전개했음은 확실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