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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민족독립을 위한 노력, 농촌계몽운동

민족독립을 위한 노력, 농촌계몽운동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말인데요. 일제강점기 시대 문자보급과 민족계몽을 목표로 하던 시절의 슬로건이기도 했습니다. 교육으로 농촌을 일깨워 민족독립을 이뤄내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제의 지배체제에 항거한 민족운동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한성도서에서 출판된 심훈의 장편 소설 상록수 초판본 (출처 : 최용신기념관)

 

농촌계몽운동은 농민의 의식과 지식·기술 등을 계몽하거나 개발하기 위하여 학생들 또는 학식 있는 지도층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형성하여 농촌사회에 봉사하는 사회교육적 활동입니다.

 

민족교육에 바탕이 항일운동

1919 3·1운동이 일어나고 뒤이어 일제가 무단통치를 철회하게 됨에 따라 한국인은 계몽운동의 정신적 맥락 위에서 민족의 대중적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농촌계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1910년대 서당에서의 민족교육 모습 이미지(출처 : 공공누리)

 

특히 당시 전체 인구의 8할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절대빈곤과 농촌 파탄은 민중운동으로 농민운동을 절실하게 했습니다. 시기 농촌계몽운동은 민족말살정책과 병참기지화에 맞서 민족의 실력양성과 민족각성을 위한 농촌운동이었습니다. 또한 문화계몽을 통한 민족교육에 바탕이 항일운동이기도 했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의 내용은 농민·노동야학과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보급운동, 농촌생활 개선을 위한 강연회, 영농의 지도, 위생시설의 개량 등을 있습니다.

 

 

11연습도_ 일제시대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글을 깨우치는 놀이판(출처: 공공누리)

 

언론기관 중심의 문맹퇴치 교육운동

운동의 특징은 문맹퇴치 교육운동이 주가 되었으며,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있습니다. 1929 6 조선일보사는 아는 것이 ,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귀향학생 문자보급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첫해에 참가한 학생 수가 409명이었으며, 이들의 노력에 의해 문맹을 퇴치한 수는 2,849명에 이르렀습니다. 운동을 통해 실제로 한글을 깨우친 사람 수는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사진4> 1931 브나로드 운동 신문기사(출처 : 독립기념관)

 

1931년에는 브나로드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사가 계몽운동에 참가했습니다.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개된 학생 브나로드운동은 10 명의 문맹자를 퇴치시켰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 전체 문맹자의 수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지만 짧은 기간에 그것도 학생들의 노력에 의하여 문맹을 깨우칠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획기적인 성과라 있습니다. 일제 당국은 갖은 방법으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의심하고 금지·중지를 자행하다가 1935 5회부터는 전면금지라는 조처를 내려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끝으로 광복 후의 농촌계몽운동은 주로 농촌사회의 근대화를 목표로 진행되었으며, 농촌사회의 소득증대와 생산력 조직화에 기여했습니다.

 

지금까지 교육활동이면서 사회교육의 범주에 속하는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이 사회교육 관점에서 현대의 우리 삶과 어떤 의미와 관계가 있는지 함께 고민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