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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

 

올해는 광복 70주년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한반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을 뚫고 얻어낸 소중한 광복. 그리고 이렇게 일제로부터 빛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청산리독립전쟁입니다.

 

 

 

청산리독립전쟁은 1920 10 21일부터 26일까지 약 6일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연합부대를 필두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 부대를 청산리 일대에서 무찌른 일련의 전투를 일컫습니다.

청산리독립전쟁은 일본군으로부터 커다란 승리를 얻어낸 것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간도침입을 완전히 실패로 돌려놓았으며, 독립 운동가들에게 큰 사기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럼 다 같이 청산리독립전쟁의 주요 전투를 살펴봅시다.

 

1. 청산리독립전쟁의 신호탄 백운평 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은 1920 10 21일 오전 9시에 백운평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로부터 시작됩니다.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독립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까지 따라 들어옵니다.  김좌진 장군은 부대를 2개의 제대로 나누어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시켰습니다. 독립군이 매복한 골짜기의 밑에는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이 곳을 지날 때에 기습을 한가한다면 단박에 승리 할 수 있는 그런 위치였습니다.

 

 

 

10 21일 오전 8시 일본의 중대 규모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전위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해있던 사정거리로 들어오자 일제히 사격을 가했습니다. 일본군은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 없어 그대로 당하게 되었고, 결국 20여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전위부대 200여명이 전멸합니다.

뒤이어 도착한 본대는 전위부대의 전멸을 보고 크게 당황하여 산포와 기관총을 사용해 맞서 싸웠지만 본대 역시 독립군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몰라 화력만 낭비하고 1200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습니다.

백운평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독립군은 10 22일 새벽 2 30분경 이도구 갑산촌으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철수 합니다.

 

2. 일본군을 희롱하며 승리한 완루구 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두 번째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그 연합부대들 (국민회군·한민회군·신민단·의민단·광복단)이 이도구 완루구에서 1920 10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을 무찌른 완루구 전투입니다. 완루구 전투 역시 현명한 전술로 일본군을 무찌릅니다.

 

 

 

 완루구 전투 초반에 일본군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양 옆으로 감싸며 포위하여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홍범도 장군은 전세가 불리해졌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전술을 짭니다. 바로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시간차이를 교묘히 이용해 퇴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양쪽에서 진격해오던 일본군들은 서로 맞닥뜨렸고, 중간에서 독립군이 쏙 빠진 것을 모르는 일본군은 서로를 적군으로 착각해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은 아군과 적군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4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대패하였습니다.

 

3. 재빠른 대처로 승리한 천수평 전투

백운평 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도구 갑산촌에 도착해 동포들이 제공하는 차조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촌락의 동포로부터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 마을에 들어가서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이를 들은 북로군정서 지휘관들은 작전회의 끝에 천수평의 일본군 기병대를 선제공격하기로 합니다. 이때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에서의 치열한 전투와 100리의 강행군으로 극도로 피곤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이 아니고서는 적을 섬멸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히 행동합니다.

 

 

근래의 천수평 (출처 :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http://www.kimjwajin.org)

 

북로군정서는 병사들을 한 시간 정도 잠을 재우고 다시 10 22일 새벽 4 30분경 천수평을 향하여 진격합니다. 독립군들이 피곤을 무릅쓰고 감행한 기습은 성공을 하였고, 무방비 상태의 일본군 기병대 제 27연대는 용케도 탈출한 4명을 제외한 116명이 전원 몰살당하였습니다. 하지만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과 부상 17명으로 경미한 편이었습니다. 

 

4.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격전, 어랑촌 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 수색기병중대를 섬멸한 후 숨돌릴 사이도 없이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천수평에서 도망쳐 간 일본군이 그간의 사정을 알려 일본군의 대응 공격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피하기보다는 맞서 싸우자는 생각을 하였고, 미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 전투태세에 들어갔습니다.

독립군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였으나, 계속된 전투로 병사들의 심신은 지쳤고, 화력과 병력 역시 일본에 비해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좌절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북로군정서 기관총 중대장 최인걸이 기관총 사수가 전수하자 스스로 자기 몸에 기관총을 묶고 몰려오는 일본군을 집중 사격하여 패주시킨 후 기관총 탄환이 떨어지자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일화는 당시 독립군들이 얼마나 투철한 정신으로 전쟁에 임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전투로 지치고 배고픈 독립군을 위해 어랑촌 아낙네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총알을 뚫고 독립군에게 조달하며 만주 동포들과 독립군이 한 마음이 되어 전투에 임했습니다.

 

 

근래의 어랑촌 (출처 : 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http://www.kimjwajin.org)

 

하지만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북로군정서군은 점차 일본에게 밀렸습니다. 이때, 마침 완루구 전투를 치루고 서방으로 이동하던 홍범도연합부대가 북로군정서를 지원하러 왔습니다. 1400명의 홍범도연합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선점한 고지의 바로 옆 최고표고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맹공격하였습니다. 결국 어랑촌 전투는 김좌진 장군의 탁월한 판단력과 구세주 같은 홍범도 장군의 등장으로 그리고 만주 동포들의 도움으로 어려웠지만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청산리전투 승전 기념 : 김좌진장군기념사업화

 

청산리 독립 전쟁은 일제가 1920 7월부터 대규모로 정밀하게 수립하여 전개한 독립군 초토계획을 무위로 끝나버리도록 완전히 붕괴시켜버렸습니다. 수적으로도 화력으로도 열세였던 독립군은 목숨을 바쳐 싸우는 군인정신과, 군사적 요지를 먼저 선점하고 화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탁월한 전술적 감각으로 일본군으로부터 승리를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독립군들이 목숨 바쳐 싸워주신 덕분에 2015년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곧 다가오는 광복절, 그때 그 시절에 목숨 바쳐 싸워주신 분들을 떠올려 보며 광복 70주년을 맞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