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한양도성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나요?
이 질문에 정확한 해답을 찾기 위해 한양도성 박물관을 방문해 봅니다.
"서울, 한양도성"
도성은 그 위치, 규모, 형상, 격식 등을 통해 한 나라의 위상과 통치 이념을 드러내는 공간이자
구조물의 집적체이다. 1392년에 개창된 조선왕조가 새 도읍으로 정한 한양은 고려의 남경이었으나
성벽조차 없던 곳이었다. 북한산과 한강 사이의 한양은 고려 시대부터 심한 제일의
명당으로 꼽혔다.
조선왕조는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 도성의 외형과 크기를
정했고, 그 내부의 시설 배치는 유교 경전의 하나인 [주례], [고공기]의 원리를 준용하였다.
백악 앞에 궁궐을 지었고 그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배치했으며 궁궐 앞 대로에는 주요
관청을, 도성 내부를 통하는 '丁'자형 대로 좌우에는 시전을 조성하였다.
한양도성의 축성
1395년(태조 4) 음력 윤 9월, 도성
축조를 전담하는 기관으로 '도성조축도감'이 설치되었다.
한양도성 축성은
전국의 양인들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점검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1396년(태조 5)에는 경상, 전라, 강원과 국경 인근 지역을 제외한 서북면과 동북면 양인들을 1차에 118,070명, 2차에 79,400명 동원하였다. 경기, 충청, 황해도 양인들은 궁궐 건설을 맡았다. 1422년(세종 4)에는
전국에서 322,460명의 양인과 2,211명의 공장을 동원하였고, 1704년(숙종 30) 이후의
도성 수축 공사는 도성 내외 군문의 병사들과 임금 노동자인 모군들이 담당하였다.
성문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공간과 그 외부 사이의 접촉을 통제하는 시설이다.
도성을 빠져나가는 사람이나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모두 성문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고, 문을 여닫는 시각은 국가가 통제하였다. 도둑과 화재를 방지하고, 성문의 개폐 상태와
수문군의 수직 여부를 살피며, 시설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궁궐과 도성 둘레를 순찰하는 것을 '순라'라 했다. 순라군은 모두 군호를 받았으며, 순찰하는 패가 서로 만났을 때 군호를 물어 통하지 않으면
통행금지 위반자로 취급되어 처벌받았다.
성문을 닫는 시각을 인정(人定) 여는 시각을 파루(罷漏)라 했다. 인정은 초경 3점, 파루는 오경 3점이었는데, 관상감에서 매일 시각을 측정하여 알리면 종루에서 인정에는 28번, 파루에는 33번의 종을 쳤다. 28번은 28수의 별자리에, 33번은 제석천이 이끄는 33천에 고하는 의미였다. 성문이 닫힘과 동시에 도성 안에서는 남자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문의 개폐를 보류하거나 폐문 시간에 문을 열려면 부험(符驗)이라는 허가증을 제시해야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1907년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한국 정부를 장악한 일본인 관리들은 위생상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숭례문과
흥인지문 밖에 있던 연못을 매립하는 한편, 성벽 일부를 철거하려 했다.
이에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구가 설치되어 숭례문과
소의문, 흥인지문 부근의 성벽과 오간 수문의 철책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실행했다. 철거된 성벽의 부재는 도로와 건축공사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이어 1914년에 소의문, 1915년에 돈의문을
헐고 그 문루와 석재를 건축 자재로 매각했다. 다른 성문들을 일부러 헐지는 않았으나, 퇴락하도록 방치하여 1928년 혜화문 문루가 붕괴되었다. 1938년에는 도로를 확장한다는 명목으로 남아 있던 혜화문 육축마저 철거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통치의 일환으로 한국인들 사이에 일본 토속 종교인 신토를 침투시키고자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12월 일본 내각에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를 제출하고 제사 지낼 신은 일본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와 한국 강점의 주역인 메이지 왕으로 정했다. 1920년 한국인들이 신성시해 온 남산 성벽 아래 국사당 자리에서 기공식이 열렸고 1925년에 준공직전 일본 내각은 신사의 격을 높여 '관폐대사조선신공'으로 개칭했다. 조선신궁과 참배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변 성벽이 대거 훼손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었지만 곧바로 자주적 정부를 세울 수는 없었다. 일본인들은 물러갔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서울의 주택은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1950년 6.25 전쟁 중에는 서울역과 가까운 남산 일대에 공중 폭격이 집중되어 숭례문이 일부 파손되었고, 성벽 일부 구간은 시가전 와중에 총탄 세례를 받기도 했다. 휴전 후에는 월남민과 상경민들이 성벽을 훼손하면서 판잣집을 지었다. 현재 성벽 주변에 있는 마을들은 대개 휴전 직후에 형성되었다.
1962년 1월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이 비로소 제정되었고, 이 법에 따라 숭례문은
국보, 흥인지문은 보물 한양도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한동안 도성의 훼손은 지속되었다. 한양도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1968년 1월 21일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울까지 침투하여 백악 성벽 주변에서 국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정부는
이 사건 직후 숙정문을 보수했으며, 1974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한양도성 전 구간을 복원하여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교육 자료로 삼으라고 지시했다. 1982년까지 9.7km를 새로 쌓았으나, 성벽 뒷채움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오히려
한양 도성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한양도성의 참모습을 확인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1999년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립 예정부지에 대한 유적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숭례문 주변, 정동 일대, 장충동 일대, 남산
백범 광장 등지에서 시굴과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10여 녀 간 틈틈이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한양도성의 완전성을 이해하고 진정성 있는 보존 방안을 마련할 수 있는 단초가 열렸다. 지하에 있는 유구 또한 한양도성의 일부라는 사실을 함께 인식하고, 보존할
방도를 찾는 것이 남은 과제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근대화의 시기를 지난 이후, 민족적 전통이 담긴 이전 시대의
유물들을 온전히 보존하고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양도성 역시 한국과 서울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기념비적 유산으로 재발견되어,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담은 구조물로 소생했다. 원 모습대로 복원하겠다는 서툰 태도가 오히려 진정성을 훼손한 사례가 적지 않았으나, 한양도성은 그 상처마저도 미래 세대에 전승할 교훈으로 품은 채 인간과 자연,
과거와 현재가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표상으로 거듭났다.
축성된 지 620여년이 지난 한양도성. 그 역사와 의미를 공부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한양도성을 파괴하지는 않았지만, 그 중요성을 알고 복원하여 후손에게 물려준다면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세계인들 앞에서도 자랑거리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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