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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대한민국과 한글을 사랑한 국어학자 이윤재!





한글을 창제한 인물은 세종대왕이지만, 국어의 발전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한 인물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인 이윤재 선생입니다. 국어를 향한 그의 애정과 열정은 훗날 국어사전과 한글의 맞춤법을 널리 보급하는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뫼라는 호를 가진 이윤재 선생은 1908, 김해의 합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국어 과목을 가르쳤는데요. 또한, 국권 회복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 계몽운동 동참했습니다.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윤재 선생 / 출처 : 한민족 정보마당>

 


그가 이렇게 국어에 매진하게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1905, 일제의 무력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때문이었는데요, 국권을 박탈당한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던 이윤재 선생은 국권 회복 위해 구국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국어 과목은 조선어라고 통칭해왔는데, 조선어라는 말이야말로 일제 강점기의 당시 상황을 표현하는 같습니다. 이렇게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고 암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이윤재 선생은 많은 독립운동가의 빛이 되어,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를 끊임없이 교육해왔습니다.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 출처 : 독립기념관>



하지만 1919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그때만세 운동을 주도하던 이윤재 선생은 일본 경찰에 붙잡히며 평양 감옥에서 1 6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이후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 본격적으로 국어사전 편찬을 위해 편찬위원의 실무를 담당했습니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 간행하는 한글과 한국사 연구를 위해 꾸준한 노력을 펼쳐왔습니다.



<이윤재 선생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사전/ 출처 : zum>

 


이후에도 진단학회의 창립에 참여하고, 기독신문사의 주필로 근무하며 이윤재 선생은 한글 보급과 우리말 사전 편찬에 꾸준한 노력을 왔습니다. 하지만 1942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 1943 12월에 순국하게 됩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는 이윤재 선생의 혼을 기리는 묘가 하나 안장되어 있습니다. 국어를 지키고자 했던 이윤재 선생의 의지는 지금도 길이 기억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