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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물건 이야기

뷰티 한류의 시작! 최초의 국내산 화장품 ‘박가분’

최초의 국내산 화장품 박가분

 

최근 한국에 몰리는 중국인 관광객(요우커)의 영향으로 관광지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서 많이 구입하는 물건 중 하나가 바로 화장품인데요, 주요 관광지마다 화장품 가게가 자리잡고 있고, 화장품 매장에는 외국인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지요. K팝과 드라마의 인기만큼 높은 품질로 인기 높은 한국 화장품. 그 시작은 바로 한국 최초의 화장품 박가분입니다.

 

가내수공업으로 시작된 박가분

 

구한말, 개화의 바람을 타고 화장품을 찾는 여성들이 늘어갔습니다. 당시 상류층 여성들은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에서 들여온 화장품을 구입해 쓰고 있었는데요, 반면 비싼 외제 상품을 구매할 수 없는 대부분의 서민 여성들은 분꽃의 열매나 쌀가루에서 백분을 만들어 사용했지요. 현 두산그룹의 창업주 박두병의 선친인 박승직은 한 할머니가 직접 백분을 만들어 파는 모습에 영감을 얻은 아내의 권유에 의해, 1916년 공장형 가내수공업으로 박가분을 만들었습니다. 제조는 부인인 정정숙이 맡았지요.

 

하면 가루형태를 연상하기 쉽지만, 박가분은 가루제형이 아니었습니다. 3mm 두께의 바둑판 모양의 작은 고형 조각들로, 한 조각씩 떼어서 물이나 기름과 섞어 얼굴에 바르도록 했습니다. 바르면 백옥 피부가 되는 박가분은 은은한 향기까지 나서 인기가 좋았습니다. 또 하나의 인기요인은 남다른 포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다른 백분은 그냥 종이에 싸서 팔던 데 반해 박가분은 박가분이라고 인쇄된 라벨을 종이상자에 붙여서 브랜드 가치를 높였습니다.


박가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참 곱기도 합니다. 한번 시험하서요.”

박가분은 1갑에 50전으로 외제 화장품에 비해 저렴했습니다. 주로 방물장수에 의해 판매가 이뤄졌는데, 하루에 1만 갑 이상 팔릴 정도로 인기를 얻으면서 오늘은 방물장수 안오나? 박가분 떨어졌는데.”라고 애타 하는 여성들이 늘어갔습니다. 이처럼 인기를 얻게 되자 가내수공업으로 만들었던 박가분은 1918년 상표 등록을 하고 한국 최초의 화장품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922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광고도 했는데요. 젊은 여인이 박가분을 가리키는 그림과 참 곱기도 합니다. 한번 시험하서요. 향수도 일이(필요) 없슴니다.” 라는 광고 문구를 실어 인기를 얻었습니다. 광고 한쪽에는 말보다 실지가 제일이외다라는 부인들의 추천사도 실려 있습니다.


박가분 신문 광고 (출처: 동아일보)

 

납꽃의 중독, 푸르게 변한 얼굴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박가분이 사라지게 된 건 유독성 때문이었습니다. 박가분은 납 조각에 식초를 붓고 열을 가해서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납꽃이 함유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심각한 납중독을 일으킨 것입니다. 화장을 많이 하는 기생을 중심으로 박가분을 사용한 여성들의 피부가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납중독은 심하면 피부가 썩고 정신착란까지 일으키는데,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순식간에 박가분의 매출은 뚝 떨어지게 됩니다.

 

납중독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승직은 1935년 일본 화장품업계에 종사하는 기술자를 초빙해서 제작 방식을 바꿉니다. 그러나 이미 소문은 더욱 과장되게 퍼졌고, 일본 화장품 업체들이 조선에 진출하기 위해 탄압을 시작하면서 1937년에 문을 닫고야 맙니다.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을 끝내 넘어서지 못하고 한국 최초의 화장품은 이렇게 시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전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한 국산 화장품들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전세계 여성들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