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과 운명을 같이한 비운의 헤이그특사, 이준 열사
이준 열사 (출처: 국가보훈처)
인간 ‘이준’과 대한제국의 이준 열사
이준 열사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조부와 숙부에게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1875년에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선생 등으로부터 재사(才士)로 인정받으며 이때부터 큰 인물로 성장했습니다. 1895년 한성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법관생활을 하였는데, 당시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선생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게 되고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펼쳐 나갔습니다.
일본의 독한 감시를 피해 고종황제를 비밀리에 만난 이준 열사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국권침탈을 노골화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감시를 더욱 강화하고, 그의 손발을 묶어놓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이준 열사는 그런 일제의 눈을 피해 고종 황제를 만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협박으로 부당하게 체결된 을사늑약(1905)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건의하였고, 윤허를 받았습니다.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본의 방해, 그리고 강대국들의 외면
헤이그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 구국의 여로 (출처: 이준열사기념관)
희망을 안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열사와 동료들은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장의 입장을 저지당했고, 헤이그 특사는 언론을 통해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 원조를 청하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우리의 주권과 모든 것을 빼앗긴 대한제국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습니다.
1907년 De Ridderzaal(평화회의장인 드 리더쟐) (출처: 이준열사기념관)
55년 후에야 사랑하는 조국으로 돌아온 이준 열사
전세계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이준 열사의 주검은 죽은 지 55년이 지난 1963년 10월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 분의 시신은 서울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어있으며, 서울 장충단 공원에는 동상이, 헤이그 묘소에는 열사의 흉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준 열사라면 2015년 일본의 역사왜곡을 어떤 생각을 할까?
얼마 전 일본 아베 총리의 미국의회연설문을 보셨나요? 일본은 과거 대한민국에 저지른 만행을 미화하고 전범자의 후손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훌륭한 장군과 동일시하며 자화자찬을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만약 이준 열사라면 어떻게 평가 했을까요? 지금의 우리 외교를 보며 또 어떻게 생각할 지도 궁금한, ‘광복 70년’ 입니다.
'한걸음기자단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1) | 2015.06.15 |
---|---|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한 국어학자, 최현배 (1) | 2015.06.15 |
인사동의 사진첩 (5) | 2015.06.15 |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선생의 삶과 교육을 느끼다! (2) | 2015.06.12 |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을 펴낸 언론인, 서재필 (1) | 2015.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