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광복을 앞당긴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2015년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매서운 바람을 견뎌내고 쟁취한 소중한 광복은 우리 민족의 다양한 방면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 내내 무장투쟁으로 30여년을 일관하며 우리 민족을 광복으로 한 걸음 더 앞당긴 독립투사가 있습니다. 바로 탁월한 지도력과 치밀한 유격전술로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은 홍범도 장군입니다.
머슴 홍범도 (출처:홍범도장군 홈페이지)
홍범도 장군은 1868년 8월 27일 지금의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머슴, 보병부대 나팔수, 제지공장 노동자, 광부를 전전하며 성장해갔습니다. 그러던 중 1893년 북청의 산포수대에 들어가 산포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가난한 평민출신인 홍범도 장군의 독립투쟁기가 시작됩니다.
홍범도장군이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가 공포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입니다. 이 법은 일본 군경이 민간에게 있는 무기라면 화승총까지 회수하는 것으로, 이것으로 인해 홍범도를 중심으로 북청의 포수들이 일제히 의거를 결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첫 의거 당시 70여 명의 산포수였던 홍범도 장군의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민, 토막민 등의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점차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본은 의병 수뇌부를 회유하기도 하고 홍범도 장군의 부인과 아들들을 인질로 삼아 죽이기도 했지만 홍범도 장군의 구국의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의병을 독립군으로 (출처:국가보훈처)
1919년 3·1운동의 열기에 힘입어 홍범도 장군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게 되고, 대한독립군은 독립운동가들의 숙원이던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합니다. 이 과정 중 만포진 전투에서 일본군 7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거두며 희망을 점차 키워갑니다.
이듬해, 홍범도 장군은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며 독립군을 하나로 통합하고 모아 대한북로독군부를 새롭게 편성하고,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킵니다. 그리고 최초로 일본의 정규군과 맞닥뜨리고 대승을 거둡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정규군인 19사단에게 대승을 거둔 ‘봉오동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2백여명을 부상케 하는 전과를 올리며 모든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압박은 심했고, 홍범도 장군은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장정을 떠납니다. 그리고 홍범도 장군은 이 과정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세를 갖추고 일본군과 다시 싸우게 됩니다. 이 전투가 바로 청산리 대첩이고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 연합 사단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회의 크고 작은 교전을 벌여 일본군 1천 4백여명에게 피해를 주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출처:홍범도장군 홈페이지)
홍범도 장군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머슴 출신의 고아였지만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전 생애 바친 분이십니다. 의병을 독립군으로 발전시킨 주역이고,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며 우리 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신 분입니다. 일제의 어떠한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가족마저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도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해 앞장선 홍범도 장군.
광복 70년인 올해, 다시 한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소중한 우리의 위인입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한걸음기자단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난 50년의 교과서, 학창시절의 추억 (0) | 2015.07.01 |
---|---|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위대한 후원자, 간송 전형필 (2) | 2015.06.29 |
고단했던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일제 강점기 시인 윤동주 (0) | 2015.06.24 |
경희궁과 덕수궁 중명전의 과거와 현재 (0) | 2015.06.24 |
수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필동 임면수 선생 (0) | 2015.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