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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수원은 화가이자 작가, 시인, 조각가,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기도 했던 ‘나혜석’(1896~1948)의 출생지입니다. 그래서 수원에는 나혜석 거리를 조성해 그녀를 기념하고 있죠. 바로 그 거리에서 신여성 ‘나혜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혜석은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의 영향을 받은 가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1913년 오빠의 권유로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 유화를 전공하였습니다. 유학시절 최승구, 이광수와 사귀면서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인 부인> 등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서울 정신여고 미술교사 재직 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으며, 1920년에는 변호사인 김우영과 결혼,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에서 첫 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전람회가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약 100여년 전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그녀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1927년 나혜석은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세계여행 길에 오르게 됩니다. 프랑스, 영국, 이태리,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미술관,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조선미전에 1회부터 11회까지 9번이나 출품하였으며 5회 때는 <천후궁>이란 작품으로 특선을 받기도 했다네요. 왕성한 활동에 뛰어난 성과네요!



▲무희(캉캉), 1940년, 41x32,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지만 세계여행 중 만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만나는 것이 문제가 되어 귀국 뒤인 1931년에 결국 남편과 이혼했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여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고 맙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점점 잊혀졌던 나혜석은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가졌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수덕사, 해인사 등을 전전하다 1948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가난하고 병든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최초의 여성 소설가,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 개최,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로 인습을 거부하고 세상을 앞서나간 선각자, 사회 운동가이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그녀는 현대에 와서 그녀가 남긴 작품들의 가치와 삶을 재조명 받고 있습니다.  


“에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굴레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그녀의 비석에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나혜석 거리는 교통편도 좋고 세련된 카페와 맛집들이 함께 있어 수원에서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수원 ‘나혜석 거리’에 한번 들러서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선각자 나혜석의 삶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요?

 


*본 글은 한걸음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