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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갑신정변 3일천하 그들은 왜 정변을 일으켰나?

갑신정변 3일천하 그들은 왜 정변을 일으켰나?

 

보통 우리는 갑신정변을 갑신년에 일어난 정변혹은 삼일천하라 부릅니다. 당시 신진관료, 즉 급진개화파들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188412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3일뿐이었습니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에 대해 알아볼까요?

 

갑신정변은 혁명 or 역모?

급진개화파들이 정변을 일으킨 명분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3, 정확히는 46시간이었죠. 이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발표한 14개조의 혁신 정강은 개혁정책들로 중국 간섭의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 등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이들이 과연 정변을 일으킨 것이 혁명이었느냐 역모였느냐, 의견이 분분합니다. 근대 국가건설을 목표로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운동이다,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한 성급한 시도로 오히려 청나라와 일본의 내정 간섭이 더 심하게 만들었다는 등의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지요.

 

갑신정변 주요 인물

갑신정변을 일으킨 주요 4인방은 급진개화파의 수장으로 호조참판과 외아문협판 등 주요요직을 두루 거친 김옥균, 영의정 홍승목의 차남으로 정변 당시 우정총국 책임자였던 홍영식, 조선 25대 임금인 철종의 사위로 한성부 판윤을 지냈던 박영효, 그리고 일본 육군학교 졸업하고 조련국 사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정변 당시 무력행동 지휘를 했던 서재필이었습니다.

 

김옥균 (출처: 한국사진사연구소)

 

고종의 입장에서는 서구 열강과 교류가 시작된 19세기 후반, 해외의 발전된 문물에 대한 견문을 넓힌 젊은 신진 관료가 필요했습니다. 또한 이웃 나라들과도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김옥균, 홍영식 등 젊은 신진 세력들을 총애했습니다.

 

급진개화파 VS 온건개화파?!

  

갑신정변 이전의 개화파 (출처 미상)

 

개화파는 어떤 방법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 차이를 보이며,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조선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서양의 과학기술과 더불어 근대적인 사상 및 제도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평균 연령 20대 후반의 젊은 층이 주를 이뤘습니다.

이와 반대로 온건개화파는 조선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부국강병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자 입장이었습니다. 민씨정권과 타협하고 청나라에 대한 사대외교를 유지하며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고 생각한 온건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3일천하로 끝난 이유?!

첫 번째, 고종과 명성황후가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환궁된 것이 실패의 요인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경우궁은 공격과 수비하기 좋은 조건으로써 급진개화파 세력이 왕을 압박하고 좀 더 정치적인 혁신정강을 발표하고 정책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면 지속했을 수도 있었으나 창덕궁으로 환궁한 것을 실패의 요인으로 봅니다.

 

두 번째, 일본공사의 말을 너무 믿었던 것이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군사적 지원 약속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가 진압하러 오자 일본군은 재빨리 철수를 하게 되어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마지막 원인은 민중의 지지가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갑신정변은 소수의 지식인이 중심이되어 급진적인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구한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공적인 혁명이 역사의 중심인 민중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비록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정책이 조금 더 일찍 받아 들여졌다면 근대화가 빨리 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