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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제암리, 그 처참한 학살 현장을 찾아서

제암리, 처참한 학살 현장을 찾아서

 

올해는 광복 70년을 맞는 해입니다. 일본이 2 세계대전에서 패한 시대적인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측면이 없진 않지만 일제강점기에도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애쓰신 우리 선조의 노력은 잊을 없습니다. 1919 3 1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은 일제에 항거하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만세운동을 펼쳤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에 일제는 강제 진압을 하였습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할 제암리 학살 사건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진압과정 일어났던 정말 처참한 학살 사건 하나입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발단

19193 말과 4 , 수원 향남면 제암리에서는 장날에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한 주민은 제암리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모였고, 수가 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은 이를 진압하고자 발포를 하였고 군중들은 일본 순사를 처단하고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는 격렬하게 시위하였습니다.

 

 

(일본 군경들로 인해 초토화된 제암리 교회 출처: 독립기념관 사적지 조사보고서)

 

일본 경찰은 독립운동의 뿌리를 뽑고자 제암리 학살 사건을 계획하였습니다. 1919 4 15, 제암리에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이들은 화성주민들의 만세운동을 강경 진압한 것을 사과하겠다면서 주민 가운데 15 이상 남자들을 모두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습니다. 이들이 교회에 모이자 일본 군경들은 교회를 포위하고 창문으로 주민들에게 사격을 가했습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죽거나 부상을 당했고 일본군은 만행을 감추려고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나는 끔직한 사건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다짐했다"-스코필드 박사

 

 

학살에 망연자실한 제암리 주민 (출처: 독립기념관)

 

사건은 당시 한국에 선교사이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있던 캐나다인 의사 스코필드 (Frank W.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 박사와 다른 선교사이자 교수였던 언더우드(H. H. Underwood) 한국 특파원이었던 테일러(A. W. Taylor)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테일러(A. W. Taylor) 제암리 사건 현장을 취재해 <재팬 애드버 타이저/1919.4.29> 보도하여 일본의 진상을 알렸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직접 찾아와 사진을 찍고 주민들에게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들은 기록한 '제암리 학살 보고서' 캐나다 선교본부에 제출하고, 장로회 기관지인 '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Presbyterian Witness)' 기고해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했습니다.

 

1982 문화공보부는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물발굴 조사에 착수하였고 지역을 사적 299호로 지정했습니다.

 

올해는 광복을 맞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100년도 넘지 않았는데 제암리에서 행해진 일제의 학살은 우리에게 잊혀지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피와 눈물을 잊지 않는 것이 진정한 광복의 의미를 새기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