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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신의주학생의거 기념일

신의주학생의거 기념일

 

11 23일은 신의주학생의거기념일입니다. 신의주학생의거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횡포에 항거한 학생운동인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주의거 기념일이 어떤 날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하는 신의주학생의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4511 18일 소련군이 주둔한 평안북도 신의주 서쪽에 있는 용암표에서 공산당 주도의 *인민위원회를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습니다  (*광복 직후 전국 각지에 조직된 민중자치기구)

이 대회에서 축하 연설을 하게 되어 있던 학생대표는 연설 도중 소련군과 공산당의 행패를 규탄하기 시작했는데요, 군중도 이 연설에 함께 동조하며 공산당 환영대회가 순식간에 규탄대회로 변해갔습니다. 당황한 소련군과 공산당은 이들을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1명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곧 신의주 학생들에게 알려졌고 격분한 신의주시의 6개 남녀중학생들은 공산당타도를 결의한 뒤, 3개 조로 나누어 행동에 나섰습니다.

 

1945 11 23 2시를 기하여 신의주 3,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대규모 시위를 발였습니다. 소련에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소·반공 의거로,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학원 자유 쟁취하자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 행진에 나섰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공산당 측은 무장한 군인들을 앞세워 학생들에게 발포하고 전차와 비행기까지 동원해 기총소사를 자행하였습니다. 결국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700여 명이 크게 다쳤습니다. 살아남은 이들도 무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체포구속되었으며,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8일자 2면, 신의주학생의거에서 피살당한 학생의 모친이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

 (출처: 동아미디어그룹 공식 블로그 http://dongne.donga.com)

 

신의주학생의거는 1970년대 초까지 국가적으로 기념행사가 열릴 만큼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사건이었습니다. 1956 11 23일이 반공 학생의 날로 지정되고, 1968~1969년에는 반공 학생의 날 기념우표가 발행될 정도였으나, 1973년 각종 기념일이 통폐합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1956년 '반공 학생의 날' 제정 기념식  (출처: 국가기록원)

신의주학생의거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반공 학생 의거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에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소련 군정 하에 놓여 있던 북한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학생 반소.반공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56년 '반공학생의 날' 제정 기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