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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홍커우 공원에 울려퍼진 의로운 포성 - 윤봉길 의사

 

1932 4 29. 지금으로부터 84 중국 홍커우 공원 하늘에는 포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당시 사상자는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해군중장 노무라, 육군중장 우에다 다수의 일본 간부들이었습니다.

 

명예로운 의거의 주인공은 바로 윤봉길 이었습니다.

84 오늘 홍커우 공원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1908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1 때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 3·1운동에 영향을 받아 학교를 자퇴하고 농민들을 계몽시키기 위해서 농촌을 부흥하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후로도 윤봉길 의사는 [농민독본] 저술하며 농촌계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얼을 부흥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수년에 걸쳐 농민부흥을 이끌었던 윤봉길 의사의 노력에 성과가 점점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과정에서 윤봉길 의사는 농민부흥운동이 민족운동, 독립운동과 귀결되어야만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결심을 바탕으로 윤봉길 의사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 백범 김구를 만나 의열투쟁을 하기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1932 4 29 일왕(日王)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사변전승축하식에 참석한 일본인 간부들을 처단하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의거 4 전부터 윤봉길 의사와 뱀범 김구 선생은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문과 폭탄을 사진을 찍어 스스로가 원해서 행하는 의거라는 것을 남긴 바로 실질적인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홍커우 공원을 답사하고 폭탄을 마련하는 체계적으로 준비를 마친 윤봉길 의사에게 바로 그날 4 29일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수많은 인파 조심스레 잠입하여 일반 구경꾼행색으로 준비하고 있다가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날 무렵 윤봉길 의사는 앞으로 헤치고 나서며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단상위로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자리에서 바로 체포되었고 25살의 나이에 총살로 순국하였습니다.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진 윤봉길 의사는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될 있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쾌거는 세계의 이목을 눈에 받았습니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의 청년이 해내었다 일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선각적인 사고를 가졌던 윤봉길 의사였는데요.

 

홍커우 공원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하루하루가 모여 대한의 독립을 이끌 있었던 아니였을까요? 오늘하루 윤봉길 의사의 의로운 몸짓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윤봉길 의사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끝으로 이번 포스팅을 마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