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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전국을 떠돌던 장돌뱅이의 삶 <보부상>


이효석의 <메밀꽃 무렵>이라는 소설을 보면, 허생원과 조선달이 달밤에 나귀를 끌고 봉평장에서 평창장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전국의 장터들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가리켜 보부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돌뱅이, 봇짐장수 같은 단어도 자주 쓰곤 하는데요. 모두 보부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보부상. 그런데 이들은 단순히 물건만 팔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보부상-권용정(소장처:간송미술관)




보부상은 무엇을 팔았나요?


보부상은 사실 보상 부상 합친 말입니다. 보상 보자기에 물건을 싸들고 다녔고, 주로 부피가 작고 가벼운, 비싼 물건들을 팔았습니다. 비단이나 모시, 금은, 가죽, 인삼과 같은 것들이요. 반면에 부상 지게에 물건을 얹어서 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았어요. 지게에 지고 다녔으니 보상 비해서 무겁고 , 값싼 물건들을 팔았겠지요? 주로 토기와 질그릇, 목제 수공품, 과일 등을 팔았다고 합니다.

 


보부상들은 아무 시장에 가서 물건을 팔았던 건가요?


아니요. 보부상들은 사실 매우 조직화된 체계 속에서 움직이는 전국적인 상인 조합이었어요. 정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각자가 담당하는 지역의 관할 유통권도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 있었고, 보상과 부상의 업무도 분담이 되어 있었어요. 보상과 부상이 충돌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지역마다 조금 차이는 있었다고 합니다. 1903년에는 보부상 관할 기구인 상무사의 부사무가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서 부상을 전담하는 기구에, 부상과 보상의 일을 분명히 구분하라 전령을 보낸 적도 있었다고 해요.




 



그럼 지역별로 보부상들이 모두 있었으니, 수가 엄청나게 많았겠네요.


그렇죠. 보부상이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고, 수가 변동이 많아 정확하게 추산하지는 못하지만, 1900년대 초반 전국의 보부상들은 5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지금도 작은 도시의 인구수가 5~7 정도 된다고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숫자죠?

 


어떻게 전국의 많은 보부상들이 오랫동안 활동을 있었던 걸까요?


보부상 조직들은 전국적인 조직망과 엄격한 윤리강령을 갖추고 있었어요. 본부를 이어 달리면서 소식을 전하는 체계적인 연락망이 있었고요.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서로 병이 들면 도와주기도 하고 죽으면 장사도 치러주었어요. 상인이라고 괄시받던 시기에, 이런 윤리강령을 통해서 서로 형제처럼 힘이 되어주었던 것이죠.

그리고 가지. 전국의 수많은 보부상들은 이러한 조직망을 기반으로 하여 나라를 위해 싸우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나라로부터 생선, 소금, 토기, 목기, 무쇠의 독점권을 얻었습니다. 물건들은 보부상들만 있었던 거예요. 일반 상인들은 없는, 보부상들만이 있는 물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개화기에 경제구조가 크게 변화하면서도 보부상들이 자리를 지킬 있지 않았나, 해요.

 


그렇다면, 많았던 보부상들. 지금은 없나요?


보부상단은 대한제국 시기에 상무사로 이름이 바뀌고, 황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단체로 성장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19세기 ,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침탈을 시작했죠. 보부상들은 그에 맞서 조직적으로 대항하였지만, 결국 통감부에 의해 상무사가 강제로 해산되어버렸어요. 이후 일본이 계속적으로 경제침탈을 자행하면서 보부상들이 자리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보부상들은 계속 상인으로 활동하며 명맥이 유지되었고, 최근까지도 마지막 보부상인 故김재련 선생이 저산팔읍 상무사 영위로서 이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자랑스럽게 뭉쳤던 보부상. 일제의 침탈로 인해 사라진 우리의 한편의 역사이기도 한데요. 최근에는 이러한 보부상들의 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충남과 경남 등지에서는 다양한 행사나 활동, 그리고 연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살아도 이익 없고, 죽어도 손해 없는 .우리 근대 격변기를 겪어온 보부상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