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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미싱은 여전히 잘도 도네, 돌아가네~ 창신동 그 곳

 

최근 DDP 개관과 더불어 더욱 화려해진 동대문시장과 웅장한 동대문 너머에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동네인 창신동이 여전히 자리하고 있지요. 이곳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한성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에 속하였는데, 가운데 글자만을 따서 현재의 동네 이름, 창신동이 유래되었습니다.

 



드르륵 드르륵~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봉제(綘製) 공장지역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창신동의 골목은 여전히 가파르고 오토바이 소리로 쉴 새 없이 분주한 서민들의 터전으로, 1960년대부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거주지였습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들은 기존의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 체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대기업들도 기성복 시장에 뛰어들면서 어려움에 처한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의 봉제공장은 땅값이 싼 창신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었지요~ 쪽방에서 선잠을 자고 고픈 배를 움켜쥐며 살인적인 중노동으로 돈을 모으던 서글픈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봉제공장을 재현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3전시실



당시 봉제공장에서는 1만 5천여 명이 일했는데, 그 중 85% 이상 대다수가 여성이고, 18세 이하 미성년자도 40%나 됐다고 합니다. 그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일을 했는데요, 실밥과 먼지가 가득한 좁은 봉제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한국의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인 청년 전태일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봉제노동자로 일하면서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하였습니다. 뜨거운 불길 속에 몸을 던졌던 전태일의 죽음은 가난 속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했던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준 가슴 아픈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그의 삶을 스크린 속으로 옮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박광수 감독)은 국민모금 방식으로 제작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불태운 곳, 버들이 유난히 많아 ‘버들다리’라 불리는 청계천 6가에는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반신 부조가 2005년에 설치되어 여전히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불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는 빠른 리듬 속 가사로 봉제공장 속 노동자들이 처한 고통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흰구름 솜구름 탐스러운 애기구름 짧은 셔츠 짧은 치마 뜨거운 여름 소금 땀 비지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사계’中 -



창신동 길을 따라 높은 성곽 길까지 한번 왔다 갔다 하면, 옷 한 벌이 뚝딱 만들어지는 신기한 마법 같은 일이 일상으로 벌어지는 곳. 창신동에 새겨진 수많은 노동자의 아픔과 노력으로 지금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탄생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본 글은 한걸음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