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하면 모두들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지독했던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빛을 만난 광복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복이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얻어졌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우당 이회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이조판서였던 이유승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조선의 명문가였습니다. 그런 가문에서 태어난 이회영의 삶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권이 일제에 의해 빼앗기자 이회영과 그의 가족들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평탄한 삶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들이 친일로 돌아서 그들의 재력과 명망을 유지하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일제가 우리나라에 대한 침탈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할 때부터 이회영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힘썼습니다. 항일의병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고 을사늑약 체결 당시 늑약의 파기운동을 전개하고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모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기지 설치를 계획하고 서전서숙 설립에 참여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파견을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1910년 우리나라의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자 이회영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만주로 간 이회영은 농업생산과 학업의 증진을 위한 경학사를 설치하고 굳건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만주의 다양한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양성하며 활발한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국내에서도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이회영은 이러한 많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투자했고 그 때문에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만주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거르기도 했고 일제에 붙잡혀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국만을 위한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이회영은 죽기직전까지도 조국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66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대련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상해 밀정에게 정보가 새어나가 곧바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진 고문 끝에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출처 : 두산백과)
이회영, 그의 삶 자체는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우당기념관이 세워졌으며 2001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번 기회에 이회영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우당기념관에 찾아가 그의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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