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긴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데요. 인조 14년이던 1636년 12월,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한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왕이 직접 군사를 진두지휘할 만큼 분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진족 출신의 누르하치가 세운 나라 후금! 태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태종은 후금에서 청으로 나라 이름을 바꿨는데요. 이 태종의 즉위식에 조선의 사절단도 참여했습니다. 꾸준히 군신관계를 요구해온 청과 오랑캐의 나라라며 청을 무시했던 조선이라 그 자리는 불편하기만 했는데요. 사절단 모두가 하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조선은 거부했습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 예법에 청과 우리의 군신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었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이는 모습 / 출처 : 소년조선일보>
지는 해였던 명나라와 뜨는 해였던 청나라.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청을 배척하려던 결과 결국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당시 조선은 군사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는데요. 가장 위협적이던 것은 임경업장군이 이끌던 군대였습니다.
<임경업 장군과 군사들 / 출처 : 충주 어린이시청>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에서 철벽 수비를 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오히려 우회하여 한양 근처까지 침입하기에 이릅니다. 그야말로 조선의 상태는 청나라로 인해 ‘풍비박산’이 되었고, ‘국력이 바닥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인조는 먼저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킨 후, 자신 또한 뒤늦게 강화도로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청나라는 한양 가까이 까지 밀고 들어온 다음이었기에 결국 인조는 한양까지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 출처 : 문화재청>
하지만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남한산성에는 50여 일분의 식량과 1만 3천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던 것이죠. 결국, 기나긴 싸움 끝에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인조는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에서 빠져나와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드려야만 했는데요. 치욕스러운 이 항복에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에 찾아왔던 최대의 위기 ‘병자호란’. 조선의 굴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처럼 국력이 위기의 상황에 놓일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외교를 끊거나, 자기중심적으로만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상황에 맞게 화합과 협의의 자세가 어느 때보다 필요할 것으로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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