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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1892년 7월 2일 설립된, 독립협회에 관한 모든 것!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단체, 백정 박성춘, 독립신문, 189672, 서재필, 독립문, 만민공동회, …….

 

첫 단어만 보고도 독립협회를 맞추신 분도 있을 테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게 뭐지 하시는 분도 있을 텐데요. 앞에 나열한 모든 것이 다 독립협회와 연관된 단어입니다. 그럼 189272일 한성부에서 결성된 독립협회에 대해 질문과 답으로 알아볼게요.

 


 

질문 하나)    독립협회가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단체가 맞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독립협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활동을 한 시민단체입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미국으로 망명간 서재필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만들었지요서재필은 고종황제와 정부 관료들을 상대로 옛날 영·정조시대의 신문고처럼, 백성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필요하다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서울특별시와 같은 한성부 아래에 독립협회라는 기관이 신설되었죠. 그러니까 독립협회는 시민단체이지만 순수민간단체는 아닌 거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재필이 백성의 의견을 중요시 했다는 거예요. 서재필은 백성들 스스로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백성들에게 권리를 주지 않는다. 자유와 권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백성의 소리가 조정과 관청에 닿을 수 있도록 독립협회를 만든 거랍니다실제 독립협회의 초기 구성원은 주로 지식인들과 정부 관료들이 주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일반 백성들도 함께 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서재필, 윤치호 등의 적극적인 지지로 백정과 노비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자주독립 의지를 나타내고자 설립한 독립문



질문 둘독립협회는 고종황제 때 만들어졌잖아요? 

                  일제강점기 때가 아닌데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거죠?

 

예리한 질문이네요! 독립협회가 세워질 때는 세계 자본주의 열강들이 약소국가의 주권을 침탈하는 그런 시대였어요.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죠. 전통적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청나라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등도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습니다그러니까 독립협회의 독립1차적으로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난 원인 중 하나가 청나라의 개입이었기 때문에 서재필 등 개화세력은 조선의 개화를 막고 주권을 침탈하는 청나라로부터 우리나라가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독립협회가 처음으로 했던 활동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모화관을 바꾼 거였어요.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고요, 모화관독립관으로 이름을 바꾸어 집회장소로 사용했지요하지만 독립협회의 독립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청나라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열강 속에서 조선(대한제국)이 다른 나라의 힘에 좌우지 않고 부강하고 자주적인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는 의미로요. 사실 독립협회도 그런 의미에서 주권독립운동, 민권운동, 개화자강운동을 펼친 거랍니다.

 


질문 셋)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어떤 관계인가요?

 

둘 다 서재필과 관련이 깊죠.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그곳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낍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며 백성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걸 말이죠. 그래서 11년 만에 갑신정변 세력에 대한 사면령이 떨어지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배운 것을 하나 둘 펼칩니다.

 

그 첫 번째가 독립신문 발간이었죠. 신문을 만든 건 백성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우선 말과 글, 그리고 국내외 사정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정부 예산을 지원 받아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18964월에 창간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72일에 독립협회 단체를 결성하죠. 차후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입장과 토론 내용, 협회에 온 백성들의 주장을 기사로 실어 민중 계몽과 여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96년 4월 창간된 독립신문

 


질문 넷 ) 독립협회가 했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뭐예요?

 

독립신문발간과 독립문설립, 그리고 중추원 개편등 여러가지 업적을 남겼지만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만민공동회 개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민공동회는 18983월 종로광장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환 민중대회인데요, 이를 통해 백성들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당당히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지만 그것이 모여 열 개가 되고 백 개가 되면 부러뜨릴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힘없는 백성들이었지만 그 목소리가 하나, 둘 모아져서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만민공동회에서 8,000여 명의 군중들이 열강의 대한제국 침략 정책을 규탄했는데요,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군사고문관이나 한로은행 등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에요. 노비해방운동도 만민공동회에서 이뤄졌습니다. 노비 제도는 갑오개혁 때 신분제 폐지로 당연히 없어졌어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많은 노비들이 존재하고 있었죠. 그래서 만민공동회에서 노비제도에 관한 토론이 상정되었습니다. 서재필과 윤치호 등은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때 많은 회원들이 노비 해방에 대해 찬성 발언을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성부의 양반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만민공동회의 모습

 

질문 다섯그런데 독립협회는 왜 없어진 거예요?

 

독립협회는 좀 더 나아가 진보 내각 구성과 의회 수립 운동을 했어요. 독립협회의 힘이 막강해진 만큼 그들을 두려워하고 음해하는 세력도 생겼습니다조병식 등수구파들은 고종황제에게 독립협회가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을 만들려고 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습니다. 결국 18981225일 독립협회는 고종황제의 명령으로 해산이 되었습니다비록 독립협회는 해산되었지만 독립협회가 추구했던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의 사상은 그 당시 독립협회에 함께 했던 민중들의 가슴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씨로 남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