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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통일을 향한 발걸음 2부 [경제, 문화편]

대홍수와 소 그리고 대륙을 달리는 기차

 

지난 1부에서는 남북통일을 위한 정치, 사회 분야의 노력을 살펴보았는데요, 이번에는 경제 분야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실상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그에 따라 남북통일 비용도 어마할 거라고 예상되고 있는데요, 그래서 남북의 경제협력(남북경협)이 더 중요한 때입니다.

 

1984년 대홍수, 새로운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다

 

남북 경제협력의 시작은 1984년 남한의 대홍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대홍수로 인한 남한의 인적·물적 피해는 상당했는데요, 그때 북한이 남한에 수재물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이뤄진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과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경협은 큰 도약을 했습니다. 양적으로 보자면 1989년에 1,9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실적이 1991년에는 1억 달러를 넘어섰고, 2000년에는 4억 달러를 돌파, 그 이후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 7.7선언: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1988)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금강산에 오르다


▲ 금강산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출처: 겨례하나 홈페이지)


19986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북한에 가면서 드디어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게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 유람선 '금강호'가 힘차게 금강산을 향해 출항하였습니다. 남북 분단 이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금지된 성역이었던 금강산은 비로소 남북이 함께 느낄 수 있는 가슴 뭉클한 산이 된 것입니다또한 2003년에는 바닷길이 아니라 당당히 육로를 통해서도 금강산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그와 함께 금강산 관광은 안정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7년에는 연 관광객 수가 35만 명에 육박, 최고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남북 공동성장을 위해 조성된 개성공단

 

개성공단 사업은 남한에게는 저렴한 인건비와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 북한에게는 남측의 높은 경제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상생이 되는 경제협력사업입니다20008월 시작한 개성공단 사업은 2003년에 공단착공식을 가졌고, 2007년에는 도로, 상하수도, 전력 등 모든 기반시설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415개 업체로 시작해서 20144월 현재 125개 업체가 입주해 있는데, 10여 년간 약 8배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2009년 개성공업지구 생산현장

(출처: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홈페이지)




달려라! 시베리아 횡단까지, 남북철도연결 사업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 물자를 옮길 수 있는 운송수단이 필요한데요, 그에 따라 남북철도연결 사업도 진행되었습니다.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 복원사업이 2000년 논의되어 2003년 마침내 연결되었습니다. 2011년 러시아 하산시와 북한 나진시를 잇는 철도 개보수 공사가 끝남으로써 드디어 부산역에서 모스크바역까지 철도가 연결되었는데요, 현재 정치적 행정적 통행허가 문제와 상품 개발 등 사업적인 절차들만이 남아있습니다. 하루 빨리 이런 절차들이 해결되어서 한반도가 대륙과 대양을 연결하는 동북아 물류 중심으로 부상되는 그 날을 그려봅니다.

 

되찾은 북관대첩비, 남북의 문화교류

 

통일을 위한 노력은 정치,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인 문화체육 분야 전반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노력이 있었는지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알아볼까요? 1985년 이산가족상봉과 함께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과 1990범민족통일음악제이후 중단된 공연예술 교류는 19985월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평양공연으로 재개되었습니다. 2006년부터는 공연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시, 영화, 애니메이션, 음반 제작 등으로 문화예술교류가 확대 되었습니다.

 

역사분야에서는 2005년 큰 수확이 있었지요.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돌려받는 사건인데요, 북관대첩비의 북한 반환은 남북 당국 및 민간이 합심하여 문화재를 반환토록 만든 첫 사례입니다. 2006년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작가들이 금강산에서 만나 ‘6.15 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어 입장하다

 

1991년 4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그린 영화 <코리아>의 한장면


스포츠 분야에서도 남북 협력은 이뤄졌습니다. 1990, 남북은 남북통일축구대회 기간 중 남북체육교류 문제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1991년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했지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은 금메달 1, 은메달 1, 동메달 2개를 획득하여 중국, 스웨덴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습니다. 무엇보다 여자 단체 대표 팀이 만리장성처럼 탄탄하던 중국을 접전 끝에 32로 꺾고 우승을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남북 단일팀을 이루는 데 실패했지만, 남북이 처음으로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코리아(Korea)'라는 이름으로 같이 입장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통일을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남북통일을 위한 남과 북의 지속적인 노력을 살펴보았습니다. 수십 년의 길고 긴 시간 동안 남북은 하나가 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 노력은 결국 통일로 귀결되어야 할 텐데요. 통일은 더욱 강하고 안정된 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 외에도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한민족이 꼭 이뤄야 할 사명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