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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남아로 태어나 구구하게 살지 않겠다!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

서울 곳곳에는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장소가 많습니다. 종로와 가까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김상옥 의사와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보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지금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첫번째 장소, 김상옥 열사 상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지고 있던 1890년 1월 5일 태어난 김상옥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17세에 동대문 감리교회 부설 ‘신군야학교’(信軍夜學校)에서 공부에 매진했고, 20세에는 ‘동흥야학’(東興夜學)을 설립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못 가는 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22세에는 ‘영덕철물점’ 이라는 철물상을 열었는데요, 일본의 단발령 이후, 가볍고 위생적이며 값이 싼 ‘말총모자’를 만들어 보급하였고, 소 편자와 대갈(말굽에 편자를 박을 때 쓰는 징), 농기구 등을 개발해 장사로 크게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지금으로 치면 성공한 청년 CEO, 벤처 기업가가 된 것이지요.



두번째 장소, 김상옥 의거 터 (종로2가 장안빌딩 옆)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는 바로 1919년 '3·1 운동'이었습니다. 비폭력을 특징으로 하는 이 거국적인 운동은 아직 청년이었던 김상옥의 마음에 독립운동에 대한 불을 지핍니다. 김상옥 의사는 같은 해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하고, 독립의 정신을 널리 알린  <혁신공보> 발행을 시작합니다. 또한 김동순, 윤익중 등과 함께 무장 의열 투쟁을 지향하는 비밀결사 암살단을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때를 만들어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는데요, 암살단이 계획한 거사는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인 종로경찰서 폭파와 당시 조선총독인 사이코 마코토의 암살이었습니다.

 

그리고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김상옥 의사는 '동일당'이란 간판집의 모퉁이에서 종로경찰서 서편 창문을 향해 폭탄을 투척합니다.

 

 

세번째 장소, 김상옥 로 (종로구 효제동)

 

 


 

경찰서 폭파에 성공한 김상옥 의사는 피신했지만, 효제동 은신처가 탄로나 400여 명(1,000명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의 일경에게 포위 당하게 됩니다. 김상옥 의사는 이에 항복하지 않고 효제동 일대에서 일경과 시가전을 벌이며 끝까지 대항했지만 결국,  마지막 총 한 발이 남게 되자 남은 실탄 한발을 자신에게 쏘아 순국합니다. 당시 의사의 나이 34세였습니다. 당시 격전지였던 효제초등학교 뒷길은 현재 '김상옥로'로 이름 붙여져, 김상옥 의사를 기억하게 합니다. 

 

 

네번째 장소, 김상옥 기념 체육관 (효제초등학교)

 

김상옥 의사의 모교인 효제초등학교는 교내 체육관의 이름을 '순국선열 김상옥 체육관'으로 짓고, 교정에 '김상옥 의사 기념비'를 세워 김상옥 의사를 기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상옥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봤습니다. 여러분도 서울 대학로와 종로 일대를 지나다가 김상옥 의사의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면,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김상옥 의사와 그의 고귀한 정신을 기억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본 글은 한걸음기자단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