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억지로 맞이한 개국의 도화선, 비극의 운양호 사건

억지로 맞이한 개국의 도화선

비극의 운양호 사건

 

영화 <명량>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단 한 척의 배로 왜군 330척 배에 당당히 맞서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려움에 뒤로 물러섰던 11척의 배는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게 됩니다. 그러한 혼신의 용기로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오늘 되돌아볼 역사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이야기인데요, 바로 1875920일에 일어난 운양호(일본발음 운요호) 사건입니다.

 

조선, 쇄국과 개국 사이에서

 

19세기 말 조선은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개국(나라 문호를 열어 다른 나라와 교류함)과 쇄국(다른 나라와의 통상·교역을 금함) 사이에서 몸살을 앓고 있던 조선의 정권은 어린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던 흥선대원군에게 있었고, 그는 철저하게 쇄국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개화는 이미 세계적인 흐름이었습니다. 이미 청나라와 일본은 서양 열강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각각 1840, 1854년에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지요.

 

1873년 흥성대원군이 물러나고 젊은 고종이 권력을 잡게 되자 자연스럽게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는데요, 이 분위기를 일본도 주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이 다른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기 전에 가장 먼저 조선과의 교역을 선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방법으로 1854년에 미국에게 당했던 포함외교(함대(포함)를 파견하여 상대국에 압력을 가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를 그대로 우리나라에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물 얻으러 와서 방화·살육·약탈을 자행하다


운양호(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일본은 군함 운양호를 조선에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항의하는 부산훈도에게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한다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함포사격 훈련을 보여줌으로써 군함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이어 강화도에 가서는 마실 물을 구한다는 핑계로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합니다. 이에 조선 수병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발사했는데요. 일본군은 운양호로 되돌아가서 곧바로 보복 포격을 시작합니다.

일본군은 영종진(현재는 영종도)에 상륙해서 근대무기로 조선수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방화, 살육,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구체적인 피해만 해도 전사자가 35, 포로 16, 대포와 화승총 등 수많은 우리 무기를 약탈했습니다. 일본군이 2명의 경상자만 난 것에 비하면 큰 피해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 체결시의 조선 측 교섭 관원(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 운양호 사건으로 인해 조선이 일본의 근대무기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일본은 군함 6척과 수백 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합니다. 운양호 포격전에 대해 조선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그들의 무력시위에 조선은 결국 1876226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한 조약인 강화도 조약(공식명칭: 조일수호조규)'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불평등한 조약을 기점으로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되고 결국,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라는 악몽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요.

 

단 한 척의 배로 나라를 지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 척의 배로 나라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사실. 명량과 운양호 사건을 되짚어보며 나라를 지키는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