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모두가 반대했던 인천상륙작전


모두가 반대했던 인천상륙작전



이제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개막이 다가올수록 경기가 열리는 인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무대로서 숱한 사연을 머금고 있는데요, 1983년 개항한 이후 조선의 관문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현장이자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광복 이후에는 산업화의 중심항 으로, 질곡의 근현대사를 겪은 도시이죠. 1950915일에는 6·25전쟁에서 북한의 승리로 기울어가던 전쟁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작전이 인천에서 이뤄졌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입니다.

 

불가! 불가! 불가합니다!

 

1950625일 새벽에 북한은 기습적으로 남침을 하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합니다. 준비된 북한의 공격에 남한은 삽시간에 부산 바로 위까지 영토를 빼앗기게 되는데요, 이 상황에서 최종 방어선인 낙동강 유역을 빼앗긴다면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설 자리는 없어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최선을 다해 막아내고 있었지만 전세는 북한의 승리 쪽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유엔에서 파견된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4일이 지난 629,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세웁니다. 아래서 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닌 허리에서 북한군을 치자는 전략이었지요. 하지만 그 작전은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의 강력한 반대의 벽에 부딪칩니다.

 

상륙작전의 대상 후보 지역인 인천, 주문진, 군산 중에서 병력, 탄약, 보급품 등 작전을 지원하기에 인천이 가장 멀다는 점, 인천항의 조수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작전을 펼치기에 위험하다는 점, 인천항에 상륙을 펼치기 전 먼저 점령해야 할 월미도가 시가전을 펼치기에 최악의 지형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인천상륙 직전의 병사들(출처 : 인천상륙작전기념관)

 

그것이 바로 적의 허점!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북한도 같은 이유로 인천일대에 대한 방어가 소홀할 거라며, 오히려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의 주장대로 8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의 승인이 떨어졌고, 연합군이 군산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리는 것으로 북한의 방어를 군산에 집중시켜 인천항의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연합군은 인천항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드디어 915일 함정 206, 7만여 명의 군인이 영종도 근처에 집결하여 작전을 개시합니다. 작전 1단계인 월미도 점령은 새벽 6시에 시작해서 2시간 만에 성공했고, 작전 2단계인 인천항 상륙작전도 적의 허술한 경계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빠른 시간에 인천항을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전세의 흐름을 바꾸다

 

인천상륙작전에 대성공을 거둔 남한과 유엔군은 기세를 몰아 불과 15일 만에 38선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압록강 유역까지 단숨에 밀고 올라가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남북통일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고. 이후 31개월간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의 비극은 계속됩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입구(출처: 인천광역시 연수구청 홈페이지)


이와 같이, 6·25전쟁 당시 전세 역전에 결정적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방국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4년 인천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의 불안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를 느끼고 있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휴전상태일 뿐이지요.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졌던 그 때 오늘,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의 희생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