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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유관순 열사 순국 94주기, 고귀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다

 

최근 유관순 열사가 인터넷 검색 순위에 올랐습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중 일부에서 유관순 열사 이야기가 누락되어 논란이 일어나면서 생긴 일이었지요.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가 순국한 이때를 맞이하여 온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했던 그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소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유관순은 1902년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재산을 털어 흥호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운동에 앞장선 애국계몽운동가였지요. 유관순은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민족의식이 높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만세시위에 참여했는데요,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조직적인 참여를 막기 위해 임시휴교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여러 동지들과 함께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위해 안성·목천·연기·청주·진천 등 인근 지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상대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자고 설득을 하기도 했습니다.


▲ 유관순 열사 수형기록표 (독립기념관 소장)

 

투옥과 순국

 

1919년 4월 1일, 수천 명의 군중이 아우내 장에 모인 가운데 조인원의 선도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유관순은 시위대 선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지요. 이날 유관순의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는 조선총독부 헌병들의 총검에 피살되었고, 유관순은 아우내 만세시위 주동자로 일제 헌병에 붙잡히게 됩니다. 천안경찰서에 투옥된 유관순은 공주경찰서로 이감되고 나중에는 서대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형기를 3개월 남긴 1920년 9월 28일, 방광파열 및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셨습니다.

 

처음에 서대문형무소는 유관순시신을 넘겨주지 않았는데요, 이화학당 교장 프라이와 월터가 유관순 옥중 사망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마지못해 시신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렇게 10월 14일 장례식이 거행되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요.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유관순 열사-

 

3·1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대략 7,500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무기도 들지 않고 ‘대한독립 만세’ 만을 외쳤는데, 그 이유만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 열사는 그 많은 희생자중 한 명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가면 유관순 열사의 수형기록표 옆에는 희생 당한 열사 또래의 수많은 이들의 수형기록표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제 갓 10살이 넘은 어린이의 것까지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일제의 총칼 앞에서 두려움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을까요? 유관순 열사는 왜 차마 언급하기도 어려운 끔찍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대한 독립 의지를 꺾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아마 어떤 비참함도 나라를 잃은 것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가을,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유관순 열사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스러져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