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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생명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개혁가 민영환

생명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개혁가 민영환

 

최근 덕수궁에서는 원래 있던 석조전을 복원하여 대한제국 당시 황실의 모습을 재현하고 여러 자료를 모아 전시를 해 놓은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새롭게 개관했습니다. 1897년 조선은 나라이름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자주독립국임을 알리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19051117일 일본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사실상 국권을 침탈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당한 일본의 행동에 온 백성이 분노와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1130, 망국의 분노를 터뜨리며 스스로 세상을 떠난 민영환도 예외가 아니었지요. 오늘은 외교사절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서구 문물에 눈을 뜬 개혁가이면서, 생명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그의 불꽃같은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을사늑약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일주 여행가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뻘로서 17세에 과거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당시 민씨 세력이 정권을 주무를 때라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는데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일제에 대한 분노로 낙향합니다. 하지만 고종은 명석한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고 18964,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보냅니다.

 

당시 교통으로는 모스크바로 바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배와 기차를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거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명환은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56일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는데, 이는 거의 세계를 한 바퀴 돈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했건만, 정작 황제대관식은 성당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자국의 관복차림으로 모자를 벗지 않은 나라의 출입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외국에 나가는 관리는 꼭 양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비록 대관식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이후 협상에서 민영환은 러시아 교관 13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군대를 근대식으로 훈련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온 민영환은 다시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는데요. 이때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민영환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일주 여행가였던 셈입니다.

 

발전된 서구 문물에 눈을 뜨다

 

민영환은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발달된 서구 문물에 대한 충격과 소감, 여행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과정을 기록한 해천추범(海天秋帆)’에는 배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요리를 먹어본 소감이나 위아래 저절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경험이 실렸습니다. 또 런던의 지하철을 보면서 땅속에 철도가 있다며 신기해하고, 발레를 관람하는 서양 사람들을 보면서 짐승이라며 혀를 끌끌 차는 대목도 나옵니다. 귀국 후, 민영환은 여행에서 얻은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독립협회의 국민계목운동을 지원하고 고종에게 여러 차례 개혁안을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을사늑약에 맞서 자결한 자리에 우뚝 솟은 혈죽

 

서구를 돌아다니며 개혁가로 거듭난 민영환의 뜻은 190511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좌절되고 맙니다. 일본의 강압에 분노한 그는 조병세와 함께 조약을 파기하고 조약 체결에 찬성한 을사오적을 처형해달라는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으로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자 민영환은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던져서라도 그 뜻을 널리 알리기로 결심하는데요. 결국 1130일 새벽, 46세의 민영환은 명함에 이천만 조선동포와 외국사절, 황제를 수신으로 하는 세 통의 유서를 쓴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민영환 유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일제히 보도되자, 많은 국민들이 애통해 하며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뒤따라 자결하기도 했지요. 그의 자결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이야기 하나를 남깁니다. 어느 날 그의 피가 묻은 옷과 칼을 보관해 둔 마루에서 푸른 대나무가 솟아올랐는데, 이 혈죽은 오래전 고구려 충신 정몽주가 쓰러진 다리에서 피어난 것과 같은 이야기이죠. 사람들은 민영환의 충정이 또다시 기적을 일으켰다며 깜짝 놀라 했답니다. 이에 일본은 민심의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대나무를 뽑아 버렸고, 이를 유가족이 몰래 간직하다가 해방이후 그 진실을 세상에 공개하기에 이르렀답니다. 자결로서, 이후 혈죽으로서 국민의 독립의지를 깨우치길 원했던 그의 충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