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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인물 이야기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 4∙19 혁명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 419 혁명 

 

<4·19 혁명 시위대>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은 /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놀은

오빠와 언니들의 / 피로 문들었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나는 알아요’ , 강명희-

 

위의 시는 419 혁명 당시 초등학생인 강명희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쓰러져 간 언니, 오빠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시입니다.

 

 

 

지난 4월 19일은 55년 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이 일어난 날입니다. 전국 곳곳에서 419 혁명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는데요, 제55주년  419 혁명 기념일을 맞아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가득했던 1960년 4월 19일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960 4 19일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 419 혁명

 

<4·19 혁명 당시 광장을 가득 메우고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19 혁명은 당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학생들과 시민들이 정권의 부패와 반민주주의 정치에 항거한, 민주주의 시민혁명입니다.

 

 

419 혁명의 배경과 역사적 의의

 

315 의거

315 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419 혁명이 일어나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와 독재 정치를 일삼았고, 이로 인해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급기야 민심은 자유당에 등을 돌렸고, 민주적인 투표로는 더이상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자유당은 1960 3 15일  4대 정·부통령 선거에 개표 조작, 입후보 등록 방해, 투표함 바뀌치기 등 부정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켰죠.

 

 

 

<1960 ·부통령선거 자유당 포스터>(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에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는데요, 정권의 무력진압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과 부상자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발표를 합니다.

 

 

4월 11일, 김주열 시체 발견 

4 11, 시위 도중 실종된 17살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자, 격분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이것이  419 혁명을 적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됩니다.

 

<4·19 혁명 당시 시위진행하는 마산 시민들의 모습>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 19,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다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정치 폭력배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 19, 분노한 학생들 수 만 명이 서울 시내로 뛰쳐나와 부정 선거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했으며, 중고등학생들과 시민들까지 참여해 전국민의 민주주의 운동이 되었습니다.

 

 

 4·19 혁명의 진행과정

 

3 15일 제 1차 마산봉기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 학생이 협잡선거 물리치자며 시위에 돌입했습니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 11일 제 2차 마산봉기

3월 15일 시위 때 행방불명 되었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이를 안 학생과 시민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피습 사건

고려대학교 3천여 학생이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불의를 규탄하는 선언문 낭독 후 시가를 행진하여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오던 중 정치폭력배들에게 피습을 당했습니다. 평화적인 학생시위에 폭력을 가한 사실이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자아내었고, 이 사건은 다음날 일어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4 19419 혁명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고,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인경무대바로 앞까지 접근했습니다. 경찰은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많은 희상자가 났습니다.이 날 서울에서만 1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전국적으로는 18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4 25일 대학 교수들의 시국 선언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제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며 시민들의 가슴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4 26일 이승만 하야

국민들의 계속되는 퇴진 요구에 못 이긴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자유당 정권도 무너지게 됩니다. 이승만은 거처를 옮기고 5월 29일 하와이 망명길에 오릅니다.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민주주의의 새역사를 쓴 419 혁명

 

419 혁명은 정권탈취나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전국민적 운동으로,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시민혁명입니다.

 

 

<4월학생혁명기념탑>(출처:국립4·19민주묘지)

 

매년 4 19일이 오면, 서울 수유동에 위치한 국립 419 묘지에는 예쁜 꽃을 든 학생들과 눈물을 머금은 할머니들, 그리고 사회 각 분야의 저명 인사들이 찾아와 그 때 쓰러져 간 학생과 시민들의 영정 앞에 경건히 참배를 합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419혁명! 세월은 흘렀지만 그날의 함성과 희생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소중한 우리의 유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