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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였던 도산 안창호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였던 도산 안창호

 

1)도산, 그는 누구인가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

그는 수많은 단체들과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고 임시정부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요, 저는 안창호 선생의 어린 시절과 업적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 도산 안창호 선생 흉상 (출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

 

안창호 선생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13살 때부터는 서당에서 한문 수학을, 16세에는 서울에서 선교사 밀러가 운영하는 밀러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접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신학문을 교육받은 그의 경험들이 어쩌면 훗날 그의 교육활동의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2)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어라”

 

안창호 선생은 1899년 평안도에 초등과정의 학교인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점진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교육자로서 자질에 부족함을 느낀 선생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소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힘썼습니다. 일제가 조국을 식민통치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안창호 선생은 국내에서 국민단체를 만들어 조국의 국권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동지들의 요청에 따라 국내로 귀국하였습니다. 고국에 돌아온 후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를 전개했습니다.

 

그러던 중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제는 안중근 의거 배후 혐의로 안창호 선생을 체포하였고, 신민회 회원들 역시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 되면서 국내에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겠다고 판단,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습니다.

 

 

3)다시 미국으로 향하다

 

안창호 선생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흥사단은 사()를 일으킨다는 뜻으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 는 뜻이었는데요, 안창호 선생은 이 흥사단을 통해 민족의 독립에 앞장 설 차세대 지도자를 길러내는 데 힘 썼습니다.

 

                               

  ▲ ()흥사단 입단 증서

▲ ()흥사단기 도안이다. 이 그림에서 기러기는 민족의 이상, 질서, 단결, 리더십, 청결을 뜻한다. (출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

 

1919 3·1일 독립만세운동과 함께 각지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는데요, 안창호 선생도 3. 1 운동 소식을 듣고 미주거민 대표로서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내무 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에 취임하는 등 1920년 상해에 통합된 임시정부가 자리를 잡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 축하기념 사진(1921.1.9) (출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

 

 

4)"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순서대로 독립협회 활동 당시의 도산, 1920년대의 도산, 1925년의 도산,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도산, 1932년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된 후의 도산 1920년대 후반의 도산, 1차 도미 활동 당시의 도산이다. (출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

 

▲ 1962년에 도산에게 수여된 건국훈장이다. (출처: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관)

 

안창호 선생 선생은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조직 사람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하던 중 건강상태가 급속하게 나빠졌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나라를 걱정하며 민족의 실력을 기르고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국 1938년 만 59의 나이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일본은 안창호 선생의 서거로 민중시위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장례식의 참석 인원을 제한하였고 공동묘지로 가는 길을 감시하였습니다. 이는 안창호 선생이 당시 민중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해는 안창호 선생 순국 77주기입니다. 하지만 안창호 선생은 아직도 완전히 과거 인물이 아닙니다. 그가 남긴 무수한 업적은 과거의 일일지라도, 그의 인격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유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성실한 자세와 정직한 마음씨를 가진, 참으로 인격적인 지도자로서 우리 마음 속에 살아있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