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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독립군 - 의병장 홍범도

독립군 - 의병장 홍범도

 

2015년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이들이 많이 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도시락 폭탄의 윤봉길, 청산리대첩의 김좌진 등 국사책에만 언급된 이들 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 많습니다.

 

KBS 1TV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2014년 광복절 기획특집으로 SNS를 통해 네티즌들이 기억하는 독립운동가 100명을 조사를 했습니다.

1-안중근, 2-김구, 3-윤봉길, 4-유관순, 5-이회영, 6-김좌진.. (이하 생략)

순위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인물 외에 의병장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거 같아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의병장 중에 리더십이 강했던 홍범도에 대해 소개하려고 합니다.

 

홍범도, 그는 누구인가?

 

                                                      

                                        ▲ 홍범도 사진 (출처: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홍범도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며 살아가는데요, 고된 머슴살이로 인해 힘들어 하는 시기에 인근에서 군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나팔수로 입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홍범도는 군 생활을 하는 도중 상급자와의 충돌로 인해 군대에서 나와 절로 들어갔는데요, 1년 반 정도 금강산 신계사에서 상좌승으로 수행하며 한글을 배우며 글을 깨우쳤고 지담 대사를 통해 항일정신과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홍범도가 의병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1907년 일제는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합니다. 이는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민간인이 가진 무기와 탄약을 거둬들이도록 제정공포한 법령으로, 총으로 수렵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산포수에게는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홍범도를 포함한 산포수들이 모여 의병부대를 결성하며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의병투쟁이 격화되었던 시기에 홍범도가 연전연승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홍범도의 군대가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활동을 했던 곳이 북쪽 함경도 지역이었습니다. 홍범도의 리더십으로 그의 휘하에 많은 의병부대가 합류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연전연승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산포수의 직업 특성상 산을 타고 지리를 잘 알며 기동력이 우수했기에 그들의 유격전이 큰 부대를 공격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홍범도의 명성을 짐작케 하는 별명?

홍범도는 평안·함경도 지방에서 ‘축지법을 구사하는 장군’,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 으로 불리며 열렬한 추앙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많이 불려 졌던 별명은 ‘펄펄 나는 홍범도’였습니다. 이러한 홍범도를 위해 여러 사람들이 그의 별명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지요.

 

 

청산리 전투에 홍범도도 참여를 했다?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에게 참패를 당한 일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총 5만 명을 간도로 출병시켰습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독립군 섬멸작전이 되었던 것이었는데요,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여러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를 위해 청산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청산리전투 중에 가장 큰 격전이 어란촌에서 벌어졌는데, 김좌진 부대를 포위한 일본 군대를 홍범도 부대가 뒤에서 기습 공격하는 연합작전을 통해 큰 승리를 거둬냈습니다. 항일 무장 투쟁 역사상 가장 빛나는 성과를 올린 청산리전투에도 홍범도가 있었던 것이죠.

 

청산리 전투에 홍범도의 이름이 언급된 것은 최근의 일로, 제가 학생 때 ‘봉오동 전투=홍범도’, ‘청산리 전투=김좌진’ 라고 배우고, 외웠던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사 책에서는 제대로 언급되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 청산리독립전쟁 승전 기념비 (출처: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생애의 마지막은 카자흐스탄, 극장 수위로?

1937년 스탈린은 한인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시킵니다. 홍범도도 이때 강제 이주되었으며, 이후 카자흐스탄 알마티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적은 연금을 받으며 불우하게 살아가다 19431076세로 사망하였습니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에 있는 '홍범도 거리' (출처: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홍범도는 태어나서 살아간 시대가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낮은 위치에서 그가 지향하는 뜻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간적인 심성과 조국의 해방을 위한 헌신, 애국정신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