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걸음기자단 History

조선시대 ‘상투’ 전쟁, 단발령

조선시대 상투전쟁, 단발령

 

많은 분들이 조선 말기에 있었던 단발령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단발령은 1895 11 김홍집 내각이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개혁명령입니다. 일본은 강요로 고종이 먼저 상투를 잘랐으며, 관리들에게도 강제로 머리를 깎도록 종용하였다고 합니다.

 

 

상투를 자른 고종황제 (출처: 공유마당/ 저작권: 한국사진사연구소)

 

단발령이라는 개혁정책을 내세웠던 정치인은 바로 김홍집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번쯤은 들어본 낯익은 이름일 텐데요, 그는 1880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신문물을 견학하고 돌아온 문신입니다. 1884 갑신정변을 수습 공로로 좌의정에 올랐으나, 외세의 압력으로 조선에 불리한 한성조약을 체결한 책임을 지고 10 동안 한직에서 조용히 지내다 1896, 일본의 지원으로 우리 역사상 마지막 영의정이자 초대 총리대신 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갑오개혁을 통해 신분제를 폐지하고 단발령을 시행하였지만, 아관파천 당시 친일파로 몰려 군중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김홍집 (출처:공공누리)

 

오랫동안 유교사상에 근본을 두고 살아왔던 조선 백성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분개하며 단발령에 반대했습니다. 특히 일본은 을미사변 이후 국민감정을 무시한 일방적으로 개혁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며 단발령에 투쟁하였습니다.

 

특히 학부대신 이도재는 명령을 따를 없다고 상소하고는 대신 직을 사임하였고, 정계에서 은퇴한 김병시도 단발령의 시행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1세대 유학자인 유길준이 당대 유림의 대표 최익현 선생을 포천에서 직접 잡아와 상투를 자르려고 했던 일도 있었는데요, 최익현은 머리를 자를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없다.라고 주장하며 단발령을 끝까지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많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문을 걸어 잠그거나 도망가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구한말 이후 모습, 단발령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따라서 단발령은 많은 성리학자들의 반발로 1897 일단 철회되었으나, 1900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전국적으로 단행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보급되어 1901년에는 한성부, 평양부, 수원부에 이발사와 이용원이 등장하는 전국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다양한 칼라의 염색한 머리와 짧고 머리 길이를 보면 당시 단발령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발령은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발부로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긴 민족적 전통과 자긍심을 고수하려는 민족의 의지일 아니라 머리카락으로 표상된 외세의 침략과 외압에 대한 투쟁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