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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광주 학생 항일 운동

광주 학생 항일 운동

 

5월 초가 되면 중고등학생들이 불만을 토해내곤 합니다. 왜 어린이날은 있는데 학생의 날은 없는 건가 하고요. 저도 학생 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의 날은 있습니다. 바로 113,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시작된 날이죠. 공휴일이 아니라 무심코 지나가는 날이지만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3.1 운동 이후 가장 큰 민족운동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난 1929년은 일본의 우민화 정책과 억압이 계속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어, 일본사, 직업교육 등을 실시하여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우민화 교육을 시키고 있었고,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도 심각했습니다.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를 당하며 항일의식을 갖게 되었고 각 고등보통학교에는 비밀학생조직이 생성되었습니다. 또한 19266.10 만세운동 이후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가 조직되었고 1929년에는 신간회의 지회 144, 회원은 약 4만 명으로 성장하여 각 지역의 청년, 노동, 농민운동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신간회 광주지사 창립기사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사이트)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시발점은 박기옥과 박준채 사건입니다.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이광춘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가 분노하여 항의가 난투극으로 이어진 사건입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여 일본인 학생 편을 들었고, 한국인 학생들은 차별을 받게 되어 집단 항의가 일어났습니다.

 

 

박준채, 일본학생들에게 희롱 당한 여학생들 (출처: 국가보훈처 블로그)

 

1929113일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이었지만 조선인에게 음력 10 3일은 개천절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시조를 기념해야 하는 날에 천황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조선인 학생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사건을 불공정하게 보도한 광주일보에 몰려가 항의했습니다. 학생들의 반일감정이 폭발한 상태에서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에 광주의 항일운동가였던 장재성(1908~1950)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2.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3.     광주중학생과 대치 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4.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5.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과 같이 일제에 대항할 자세한 행동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주도로 학생들은 광주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가두시위를 했으나, 시위에 가담한 70여 명의 조선인 학생 중 60여 명은 구속되어 검사국(오늘날의 검찰과 유사)으로 송치되었고, 도립병원장이 병원에서 치료받던 학생들을 치료할 가치도 없다는 망언을 들었습니다.

장재성은 광주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해 배포하여 광주여자고보의 여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대항하였으나 일제는 250여 명의 학생과 사회운동단체 간부들도 검거하며 탄압하였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무기정학, 퇴학을 당했고 일제는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각종 탄압에 대한 소문이 커지면서 그동안 응축되었던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족운동으로 평가되며 신간회 등 각종 단체들이 함께 참여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차별, 우민화 정책이 고조되던 1920년대 후반에 학생들과 압박 받던 조선사람들의 분노에 여러 단체의 후원까지 더해져 체계적인 시위 운동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정의와 평등을 향한 외침이 오늘날 광주 학생 항일 운동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매년 돌아오는 113일 그 날은 평등하게 우리 국민으로서 가르침을 받고 살고 싶었던 분들의 외침을 되새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