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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기자단 History

탈북자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는 북한

탈북자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는 북한

 

625 전쟁이 1953년이 된 이후 남북한 민간인 교류가 없었던 지 이제 62년이 되었습니다. 두절된 교류로 인해 남북한 주민들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은데요, 우리 조는 북한 사회에 대해 더 배우기 위해 50대 탈북자 선생님을 인터뷰 했습니다. 탈북자 분의 신변 보호를 위해 이름 등 상세 정보를 공개할 수 없는 점 양해 바랍니다.

 

1970~1980년대 북한 사회에 대한 인터뷰 내용:

 

Q1.  1974년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임명되었을 때 사회적 분위기/반응은 어땠나요?

A: 북한 정권에서는 김정일을 1972년부터 서서히 노동신문, 조선중앙TV 등 각종 언론매체에 노출시켰습니다. 그리고 항상 김정일을 위대한 수령님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지칭하고 세습이라는 단어는 물론 일절 안 썼습니다. 그렇게 세뇌 당해서 주민들은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매우 당연히 생각했어요.

  

북한 주민들이 의무적으로 항상 달고 달아야 하는 초상휘장 (김일성, 김정일 부자 초상화가 달린 배지) (출처: Daily NK)

 

Q2. 1989년 임수경이 북한으로 간 사건은 유명합니다. 임수경이 북한에 갔을 때 사회적 분위기는 어땠나요?

A: 임수경이 연설문을 보지도 않고 자유롭게 연설을 하는 모습을 북한 주민들은 자유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말을 조금이라도 잘못해도 말 반동으로 간주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대본을 보고 연설하고, 김일성이나 김정일 언급할 때에는 존칭어에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예를 들어 위대한 김일성 동지라고 안 하고 김일성 동지라고만 해도 비판 받고, “김일성이..” 라고 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임수경이 연설문도 없이 발표하고, 더군다나 본인의 모국 정권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고 일부 북한 주민들은 저것이 자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1989년 북한 고려호텔 앞에서 임수경을 보러 운집한 수많은 북한 주민들. (출처: Daily NK)

 

1990년대 북한의 상황 인터뷰 내용

Q1. 19947월 북한 김일성이 사망했습니다. 이때 한국에서는 전쟁이 발발에 대한 공포가 팽배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A: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북한 사회는 늘 김일성을 하나의 큰 태양이라고 선전해왔습니다. (김일성의 생일인 415일은 “태양절”이라고 불리며 북한의 최대 명절입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한테는 태양이 떨어진 것과 같은 분위기로, 나라 전체는 암흑의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남한에서는 전쟁에 두려움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던 것과 달리, 북한에서는 한없이 슬픈 날이었습니다.

 

Q2. 지금도 김일성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엄청난 나라의 돈을 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이것에 대해 반발하지 않습니까?

A: 김일성이 사망하고 북한에서는 주석궁전을 지었습니다, 거기 안에 김일성의 시신을 미라로 보존합니다. 저도 갔던 기억이 있는데요. 나중에 이곳은 금수산태양궁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김일성이 “태양”이다 하여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이 보존 과정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내부적인 불만이 쌓여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밖으로 표출을 못하고 있긴 하지만요. 

 

미라로 보존된 김일성 시신과 주변에 놓여진 꽃들 (출처: Daily NK)

 

Q3. 1997년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 권력 핵심 활동가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사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A: 당중앙위원회 비서인 황장엽은 북한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황장엽의 남한으로 망명은 북한 사회에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보통 사람이 탈북해도 북한사회에는 큰 충격으로 남는데, 권력기관 핵심 인물의 탈북은 몇 배로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에게 황장엽은 ‘지주의 아들’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로 ‘변절’했다고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주는 ‘황’()씨가 많다고 말하며 황장엽을 반동분자로 취급합니다.

 

황장엽 귀순 당시 기자회견 사진 (출처: 공공누리)

 

Q4. 1990년대 말 200~ 300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이 북한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세요.

A: 94년도 김일성 사망 후, 95년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은 ‘아사’ 혹은 ‘기근’이라는 단어를 기피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빨치산에서 일본군에 저항할 때 썼던 말인데, 이 말로 기근을 포장해서 주민들의 동요를 막았습니다. 그 당시 정말 시체 많이 봤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시체 5~6구를 산에 묻고 오면 참기름 1병을 줬어요. 참혹했죠. 이 당시 북한이 외화벌이를 하면서 돈을 벌었었는데, 그 돈을 주민들을 위한 식량에 안 쓰고 미사일 개발 등 돈을 모두 군사 발전에 썼어요. 그리고 기근은 세계적 이상 기후와 식량위기로 인한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더군다나 북한의 식량난은 미국의 독점 제국주의가 경제를 모두 봉쇄했기 때문에 악화된 것이라고 주민들에게 알렸어요.

 

2000년대에 대한 질문

Q: 북한에서는 정부가 지정한 중국 영화 외에는 외국 드라마나 영화가 불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인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A: 북한에서는 외국 문물이 불법입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은 외국 혹은 한국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모든 영화나 언론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기 때문에 싫증을 느끼는 주민들이 많습니다. 반면에 한국 드라마는 인간의 정서를 다루기 때문에 더 와 닿고 재미있습니다.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나 영화 시청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