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적 국가 기구,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사실상 일본의 패배는 분명해졌습니다. 이에 8월 15일, 조선총독부의 실권자인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조선에 있는 민간인과 군인들의 신변보호 및 안전 귀환을 위해 여운형에게 행정권 이양 교섭을 했습니다. 여운형은 이전부터 건국동맹을 통해 국가기구 수립을 협의했기 때문에 8월 16일에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음을 발표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8.15해방 뒤 가장 먼저 결성된 유일한 정치조직체로서 건국을 준비하는 기관, 즉 ‘다음 단계의 정부 수립을 기초하는 준비기관’ 이었습니다.
▲엔도 류사쿠에게 요청한 5개항 보장 조건
여운형은 당초 각계각층 인사들을 망라한 거족적인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역량 있는 지도급 인사들과 연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 지도자들은 ‘임시정부 봉대’를 내세우며 거부하였고, 안재홍, 최근우, 이규갑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의 중앙조직을 구성했습니다.
▲여운형의 모습 (출처: 경기문화포털)
건국준비위원회의 소식이 지방에까지 전해지자 지방에서는 지방지부가 형성되었습니다. 지방지부는 공공기관을 접수했으며 건국치안대를 조직하여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영향력과 활동이 확장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8월 22일 다섯 개의 부서를 확대하여 12부 1국 체제로 개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8월 28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는 국가건설의 준비 기관이며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건국선언문과 건국강령을 채택했습니다.
▲건국강령
건국준비위원회는 형무소에 갇힌 독립운동가들을 석방했으며, 치안을 담당했으며, 식량을 확보하고 적산관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건국준비위원회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건국준비위원회에 위기감을 느낀 우파 세력의 물밑작업으로 안재홍과 우익인사들 상당수가 탈퇴하였고, 박현영 계열의 공산주의자들이 내부의 세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좌파에 장악된 건국준비위원회는 크게 변질되었습니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고, 지방지부는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며 해산됩니다.
비록 건국준비위원회가 실패로 그쳐졌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대립하고 있을 때 자주적으로 국가를 수립하려는 조직이었음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본 글은 한걸음 기자단 개인의 의견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편집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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