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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기는 History/나의 이야기

거리를 가득 메운 독립을 위한 외침 - 3·1운동



여러분 안녕하세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33월의 첫날은 바로 3·1절입니다

이맘때면 3·1운동으로 희생된 선열들을 추모하는 태극기가 거리 곳곳에 걸린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번 포스팅은 3·1운동이 시작된 배경과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해방을 갈망한 함성의 도화선




미국 제28대 대통령 Woodrow wilson[출처 :CNN]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들에게 조국의 독립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여기에 1919년 초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해져 3·1운동의 불을 지폈습니다





110만의 거대한 몸짓



민족대표 33인 기록화 [출처:미상]


종로구에 위치해 있던 태화관에서 애국계몽운동계의 민족대표 33(실제참여자29)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학생들이 종로의 탑골공원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소리쳐 낭독했고 노동자, 농민, 상인, 시민 등의 시위로 발전하여 전국 중요 도시로 확산되게 되었습니다. 19193·1운동 참가자 수는 전국적으로 110만 명에 달했고, 일제에 희생된 선열은 7,500여 명에 달했습니다.


3·1운동의 규모만큼이나 무자비했던 일제의 탄압. 비폭력적 운동을 진행했던 군중에게 거침없이 사격을 가했는데요, 그 대표적인 예가 일본군이 벌인 제암리 학살 사건입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제암리 근처 발안지역에서 3·1만세 운동을 벌인데 대해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 주민들을 집단으로 무자비하게 살인한 만행으로, 일제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우리민족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린 비폭력 운동





3·1운동 [출처:미상]



3·1운동에는 전국적으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습니다.

농민이 가장 많이 참여했지만 민족자결주의라는 세계의 흐름을 읽고 있었던 학생 및 지식인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운동을 이어나가는데 큰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거족적 자주독립운동인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초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가 될 만큼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움직임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3·1절은 어떤 의미인가요?

97년 전의 함성의 물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3·1절을 맞아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였습니다.

3·1절을 기념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하여 각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3·1절은 어떤 의미인지 새겨 보시길 바랄게요!




97주년 삼일절 교육문화행사 자세히 보러가기 (로고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