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은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한국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멋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남산, 그 자리에서 100년 전의 누군가는 순수하지 못한 눈으로 서울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조선신궁(朝鮮神宮)’이 그것입니다.
조선신궁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우선 ‘신도(神道)’란 일본에 오랫동안 이어져온 토착신앙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사’는 신도의 사찰을 이르는 말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천황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도를 이용했는데요. 일본 국민들에게 천황을 신격화하여 참배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도 신도가 들어왔습니다. 일제는 한국인들에게도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으며, 이를 위해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했습니다.
우리에게 ‘신궁’이라는 말은 조금 생소하긴 합니다. 보통 신도하면 신사를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신궁은 신사보다 더욱 격이 높은 곳이며, 신도의 사찰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높은 건물입니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이러한 신궁을 남산에 세운 것일까요?
남산은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한반도에 있던 신사 중에서 가장 격이 높은 조선신궁을 남산에 건립하여, 일제가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것을 상징하고자 했습니다.
일제가 신궁의 건립부지로 남산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국사당(國師堂)’ 때문입니다.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당시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남산에 지은 사당인데요. 개화기를 거치면서 많은 신당이 철거되었지만, 남산에 있던 국사당만은 유지되었을 만큼 국사당은 우리 민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국사당을 현재 위치인 인왕산으로 강제로 이전시켜버렸습니다. 또한 국사당의 한문 표기 역시 ‘國祀堂(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에서 ‘國師堂(나라의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격하시켰어요. 여기에서 우리는 한민족의 성역(聖域)이었던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여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부분까지 지배하고자 하는 일본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신궁 건립이 10년째 되는 해에, 일제는 <은뢰(恩賴)>라는 제목의 사진집을 발간했습니다. 일본인 사진작가인 야마자와 산조가 10년 동안 조선신궁에서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생활상을 500여 장의 사진으로 담아낸 것이죠. ‘은혜를 입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은뢰>의 발간을 통해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신의 가호를 받아 번영을 누린다’고 홍보하고 일제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래의 목적과는 조금 다르게, 현재 <은뢰>는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은 어땠는지 등을 사진을 통해 자세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조금 아이러니하죠?
밤이 되면 반짝거리며 화려하게 빛이 나는 남산에도 우리 민족의 아픔이 숨어 있었습니다. 서울 시민이라면 한 번쯤은 올려다보았을 남산, 다음번에 남산을 바라볼 때에는 이런 이야기도 떠올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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